<그 후>, 아름 혹은 유머

행진하는 영화 2017. 9. 9. 19:03

* 이것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초고이다. 글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기에, 이 글을 백업한다.


 

결국 유머란 견고하게 세워진 픽션과 픽션들 사이를 관통해 구멍을 뚫는 화살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픽션이란 무엇인가.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만이 픽션이 아니다. 인위적인 '가상'의 논리가 곧 픽션이다. 그렇다면 구멍이 뚫린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것은 곧 픽션이 픽션으로서 실패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픽션이 그 구성의 기반으로 삼은 '사실'의 논리가 사실 '사실'이 아님을 폭로하는 순간이기에, 훌륭한 유머란 (표적으로서의 픽션에 대한 '공격'의 정확도를 위해) 심각함과 태연함을 겉에 두른 채 픽션들이 선 고정된 지각을 흐트러뜨려 개중 무능한 픽션을 폐기하고 '사실'적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훌륭한 픽션을 유지 및 각성시키는 힘을 지닌 것일 터이다. 앞서 "훌륭한"이란 형용사가 각각 "유머" "픽션" 앞에 붙은 채 반복되었는데, 이 반복은 유머 역시 결국 어떤 인위적 논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즉 유머의 토대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유머가 유머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 한 유머란 성공적인 유머일 수는 없다.

 

유머란 예컨대 농담처럼 단발적으로 웃음을 유발하고선 명멸하는 이미지, 혹은 웃긴 것 뿐만이 아니라 태도, 방법론, 혹은 더 나아가 이념 역시 포함하는 것으로, 이 태도의 가장 명시적인 예로 우리들 중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 중 하나인 홍상수의 근작 <그 후>를 떠올리는 게 좋을 터인데, 극 중 김민희가 분한 아름은 봉완(권해효) "그럼 아름이는 뭘 믿어?"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거.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것. 이 세상을 믿어요" 여기서 두 번째와 세번째 사이에 "그렇기에"라는 연결사가 괄호쳐진 채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앞의 두 믿음이 일종의 조건으로서 충족되어야만, 세계를 긍정하는 세번째 믿음은 가능해질 수 있다.

 

개인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혹은 '살아있음'이란 상태에 어떻게든 집착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제아무리 초월을 추구한들 결국 '세계'의 절대적 영향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계의 존속과 재생산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세계'가 진행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완전무결하게 확정된 주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불가능성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주체이고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라는 태도, 곧 유머이다. 아도르노의 말, "즉 어떤 한계를 설정하게 되면 그러한 설정을 통해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봉완이 되새긴 "내 인생은 포기하자"라는 주문 역시 불가능성의 직시라는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유머러스하다 오해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의 딸의 아버지라는 한계 설정은 (봉완 스스로 인정하듯) 자기파괴를 향하고 있지 아름의 경우처럼 자기해방을 향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사태의 책임을 모호한 언어로 비켜가려 하는, 경멸스러운 자아방어기제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름이 내뱉는, 불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언어는 봉완을 필두로 한, 상황의 표면에 대한 자신의 (증명되지 않은, 혹은 원하는) 주관을 앞세우며 비틀린 시간 속에서 '나가지 않는' 고착을 선택한 극 중 인물들과는 아름이 전혀 다른 성질의 형상임을 예고한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이라고 해야하는 건, 본작에 등장하는 유리문들, 특히나 때에 따라 투명도를 달리 하며 때로는 심연의 색을 입는 출판사 사무실의 그것이 거의 입()만을 허용하는 경계로서 작동했으며 오직 아름만이 출입구로서의 유리문들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멍을 뚫고 그 사이를 유유히 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지극히 반골적인 작가라면 이는 그가 소위 지식인 남성들의 찌질함을 폭로함으로서 남성 중심적 세계를 저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앞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 인물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프레임과 씬의 배열을 통해 은연중에닫힘을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고정적인 가치(언어, 시간, 현실, 표면 등)를 거부하며 그 영토들에서 탈출하거나 대안을 갈구하는 방식으로 위계를 생산하는 관념적 토대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홍상수의 세계에서도 <그 후>에서 만큼 자유에의 추구가 격렬한 파열음을 냈던 적이 있었던가

트윈 픽스: The Return에 대한 메모

행진하는 영화 2017. 9. 1. 21:16

<트윈 픽스>의 새로운 시즌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번지르르하나 가장 따분한 말은, 아마도 이 작품이 '둘로 나뉜 영화'의 일종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일 맥라클란이 데일 쿠퍼와 그 사악한 도플갱어와 더기 존스라는 1인 3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 엠파이어>의 방법론의 연장선상에서(만) <트윈 픽스: The Return>을 독해하려는 고착적인 시각들 말이다. 이것은 이 직전의 린치의 작업들의 선로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는 린치 스스로가 스스로의 세계를 통합, 결산지으려는 듯한 면모가 보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저 3편의 작품들이 배우의 육체라는 유일성의 기표에 서로 불화하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를 서사 구조(들) 안에서 은밀히 혼재시키는 방식의 역할 전이 - 이 말은 굉장히 주의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 를 통해 영화에 (유령들을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강령의 구멍을 뚫고 객석을 위협하는 미스터리를 형성하던 것과는 달리,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카일 맥라클란의 배역들에 강력한 캐릭터성을 부여해 구조적 난교의 상황을 회피 (혹은 지연?) 하고, (8화를 제외하면) 타임라인을 상대적으로 선형적으로 구성하는 등, 엄밀한 의미에서의 서사 해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의 선로는 어디인가? 특유의 편집과 특수 효과에선 구조주의 영화에 걸쳐있기도 하고 린치의 영화적 기원이라 할 만한 5~60년대 B급 호러 무비에 걸쳐있기도 하고 혹은 <인랜드 엠파이어>의 디지털 질료에 걸쳐있기도 하며, 지금까지의 린치가 맥거핀에 가까운 질문("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리타는 대체 누구인가?")을 제시하고 서사를 구동하던 것과는 달리 그런 질문 자체가 사라져있기도 하다. 허나 그렇다고 섣불리 <트윈 픽스: The Return>를 (극적 서사에 관심이 없는) 시청각적 실험의 영역으로 분류시켜선 안 된다. 린치라는 작자는 언제나 완전한 구상과 완전한 추상 사이의 불안전한 지대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그 형체를 거의 논리적으로 식별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며, 이는 군상 부조리극의 성격을 체현하고 있는 <트윈 픽스: The Return>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점은 나머지 에피소드를 본 뒤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만 <트윈 픽스: The Return> 라는 작품이, 더 나아가 데이빗 린치의 세계가 결정화되는 주요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구멍-함몰점-통로가 연결되는 이미지일 터인데, 첫 에피소드의 첫 시퀀스에서 <인랜드 엠파이어>의 엑손 라디오 광고처럼 소리의/에 기이한 강도를 '작동'시키는 축음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를 내뱉는 통로로서의 축음기 구멍은 큐브에 뚫린 구멍, 구토하는 입, 차 키 구멍, 콘센트, 천장의 공동, 하늘에 뚫린 구멍,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구멍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로스트 하이웨이>에 이르러 규범적인 '이름'을 해체하던 분열된 육체를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 자체로 흉포하게 찢겨져 폭력적인 감각을 생성 및 이동시키는 통로로서의 육체로 변이시킨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신체'의 해체라는 린치의 오랜 주제의 한 결산인걸까. 혹은 <트윈 픽스: The Return>과 그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동시대의 작가로는 -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에 등장하는 하얀 연기들은 어딘가 아핏차퐁의 그것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 영화 안에서보단 영화 바깥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내가 여기서 떠올리는 이름은 바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데이빗 린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모방하고 있다. 상호연관적으로 구성되는 실제와 환상의 불분명한 도식과 그 도식의 불분명함을 가능케하는 특수한 공간의 유사함이 그러하며, 2~3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공간들, 특히 3화 첫 시퀀스의 공간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208호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부터의 하루키가 천착하는 (유사)형제 혹은 부모자식간의 관계라는 모티프가 도처에서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더기 가족의 변화에서 가장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부정의 대상인 아버지로서의 더기, 이를 대체하며 그 낮은 지능(의 수동성)에 의해 오히려 주변 세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치유하는 (더기-쿠퍼의 외면적인 이질성을 주변 인물들이 서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걸 이 지점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더기-쿠퍼, 그리고 '깨어난' 뒤에 그 세계와의 작별을 선언하는 쿠퍼. 이는 같은 16화에서 다뤄지는, 리차드 혼에 대한 사악한 쿠퍼(Evil Cooper)의 끔찍한 아버지상과 강하게 대비된다. 혹은 사악한 쿠퍼는 "I don't need it, Ray. I want it."이라고 말하며 '필요'라는 자기결핍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한 편, 쿠퍼는 마이크와의 대화에서 "I need to make another one"이라고 말하며 자기결핍의 언어를 긍정한다. 아마 정신분석학 비평가들은 이 지점에 천착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도 비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행진하는 영화 2017. 8. 29. 23:37

물론 단 한 번도 영화 비평지였던 적이 없으며, 그나마도 신전영객잔의 은밀하고도 갑작스러운 폐지 이후로는 명목상으로라도 내걸었던 비평이란 두 글자를 잡지 뒷면에 쑤셔넣어버린 씨네21이지만, 최근 이 잡지가 비평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가 이 잡지가 영화계에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른다. 이미 우리는 씨네21이 비평이란 이름에 걸맞는 행보를 어떻게 보여왔는지 알고 있다. 씨네21이 2016년 영화 결산에서 박찬욱의 졸작 <아가씨>를 1위에,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6위에 꼽은 것은 물론 굳이 여기서 길게 논할 필요도 없는 넌센스적 사태이지만,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침묵은 넌센스라고도 할 수 없는 치졸한 태도였다. 그 때 홍상수는 김민희와의 불륜 스캔들로 인해 공공의 질타의 대상이 되어있었고, 그런 와중에 개봉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아주 적은 수의 관객들과만 만날 수 있었다. 그래, 혹 씨네21 소속의 평자들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좋지 않게 봤을 수는 있고, 그래서 박하게 지면을 할애했을 수도 있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그렇다. 하지만 스캔들로 인한 힐난들로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옹호하지 않은 것은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평소 홍상수의 영화에 덮어놓고 예찬을 늘어놓던 - 개중 실속있는 예찬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논외이다 - 씨네21이 이에 대한 그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던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이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도 통용되는 논리다. 여러번에 걸쳐 <불한당>에 관한 기사를 실었던 씨네21이지만, 그의 정치적 성향과 시니컬한 드립을 가감없이 기록한 개인 트위터로 인해 소위 '깨시민'들로부터 불합리한 사이버불링을 당했으며 나는 학교 사람을 포함, 오프라인에서 그를 '정신병자'라며 욕하던 이들을 몇몇 본 적이 있다- 그런 불합리한 이유로 스스로의 영화가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던 <불한당>의 감독 변성현을 위한 변호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단 한 줄의 지면조차 할애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사한 사태가 유사하게 -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 반복되었다면, 씨네21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둘러싼 스캔들에 개입하길 피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대중의 거친 분노 앞에서는 "영화는 영화다"라는, 아주 간편한 회피의 제스쳐조차 그들에게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물론 이 제스쳐는 나중에 송경원 평론가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대해 쓴 글에서, 마치 자신은 이 사태에 대해 당당하다는 듯 취하긴 했으나, 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함에 있어서조차 지나친 지각에 지나친 당당함이 깔려있다는 점에서 실은 수치스러워야 할 제스쳐이다) 하지만 반향이 두렵다고 해서 그 분노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판에 미세한 진동조차 일으키기 전부터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비평지'로서의 책임방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서의 씨네21의 비평적 침묵이란 자신들의 무능력과 안일함에 기인했던 지금까지의 비평적 침묵과는 달리, 외적 요인으로 불합리한 비난을 받는 영화와 영화인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는 대신 옹호와 더불어 딸려올 비난들로부터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펜을 내려놓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비평적 침묵이다.


이런 비평적 침묵이 보다 비겁해지는 맥락이 있다. 바로 씨네 21의 1119호로, 바로 <군함도> 논란에 대한 코멘트가 실상 핵심인 호이다. 타이틀인 "지금, 영화 평론의 유의미함을 묻다"에서부터 '대체 당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따져묻고 싶어지나 이를 참고 장을 넘겨보면 에디토리얼의 제목 "결국 영화를 지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 내용까지 읽은 뒤에는 도저히 참기 힘든 분노가 울렁거린다. '#영화계_내_성폭력' 관련 대담을 몇 회에 걸쳐 특집으로 다뤄온 편집장이 "스탭의 별것 아닌 SNS 불평도 ‘모 영화현장의 불합리한 처우’로 둔갑해버리는 세상이다"라고 단언해버리는 것도 끔찍하지만 (설사 그렇다고해도, 한국의 영화 제작 현장이 얼마나 열약하고 폭력적인 지 알고 있다면 저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군함도>의 역사관과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비판들을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자유롭게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기도 전에, 어떤 ‘선동’의 조짐이 있었다고 느꼈다"거나 (심지어 이것은 '그' 박찬욱의 말이다!) "어떤 영화의 역사적 허구는 동조되는 반면, 왜 또 다른 영화의 역사적 허구는 동조되지 않는 것일까"라고 칭하며 이를 "몰상식한 여론몰이"로 축약하는 반지성적 태도는 더더욱 끔찍하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일도 그렇고 그 패배의 기억이 창작자의 의욕을 갉아먹는 일일 것이다"라며 "영화로 저항"하는(!) 류승완에게 깊은 연민을 보내는 마지막 단락은 또 어떤가. 아니, 주성철 편집장 본인이 나서서 이렇게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영화를 지"키려는 자신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군함도>가 어째서 질타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군함도>의 역사 각색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부정으로 향했는지, 또 <군함도>와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어떻게 완곡히 분리할 수 없는 성질을 띠고 있는지 모두가 말하고 있으나, 마치 씨네21만 이를 모른다는 듯 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선 <군함도>를 그런 시각들로 지키기 위해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포함한 특집까지 싣고[각주:1] 그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군함도>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김영진의 비평 에세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운동과 활력이다나는 여기서 김영진이 얼마나 영화를 재밌게 봤는지를 비판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나, 겨우 이 정도의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론까지 어떻게든 끌어오는 데서 폭발하는 김영진의 빗나간 오기에는 관심이 있다대체 어트랙션 몽타주의 피상적인 지점만 끌어와 -자크 랑시에르가 지적했듯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의 힘은 그로테스티컬하고도 에로틱한 충돌에서 생성되는 것이다영화의 모든 맥락을 억지로 제거하고 그 레토릭만으로 <군함도>의 몹 씬을 상찬하는 것에 어떤 '비평적 태도'가 스며들어 있단 말이며영화의 남성중심적이며 전시적인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비판(“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보고 싶었던 조선 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하는 박유하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정작 이에 대한 반박이나 논증의 과정 없이 이 영화의 활기가 맘에 든다고 일순에 어처구니없이 결론을 내버리는주장으로도 성립하지 못하는 감상에서 어떤 '비평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김영진은 여기서 찬성을 위한 찬성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다특히 “<군함도>에 대한 상기한 비판들은 그 자체로 반박할 만한 근거가 내겐 없다다른 각도에서 얘기를 풀어가고 싶다.”는 문장은 그로 하여금 반박하기 힘든 주장을 비켜가고 민중 프로파간다로서의 정당성이라는 주장으로만 직진해전적으로 영화 안에서만 영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어설픈논리를 은근히 세우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를 두고 20세기 대중영화에 대한 비평 프레임을 자동적으로 끼워맞추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이드리언 마틴 이후에 비평의 영역에서 그 시대의 도식성과 현재의 도식성을 온전히 비교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김영진은 <군함도>가 군함도라는 역사적 이미지 자체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범용한 천함에 함몰되었다는 것을 기어이 부정하려는 듯아니 아예 눈을 감으려는 듯 보인다사실 이것은 김영진만의 문제가 아닌주성철 편집장을 비롯하여 이 수준의 비평을 별다른 코멘트 없이 기어이 싣고 만 씨네21 편집진의 문제일 것이다씨네21이 '비평지'로서 한 영화를 위해 이 정도의 적극적인 옹호의 스탠스를 위한 것은 아마 <비밀은 없다> 이후 처음일 것이다. 


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불한당>의 사례와 <군함도>의 사례를 가르는 명확한 옹호의 잣대를 파악할 수 없다. 이 세 영화 모두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았으며 어느 영화를 옹호하든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하나, 앞의 두 영화는 영화 외적인 스캔들과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한, 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폭력적인 거부였고 (그런 점에서 <군함도>에 대한 박찬욱의 코멘트는 이 사례에 더 어울린다) <군함도>의 경우는 이미 영화를 본 대중 사이에서 반대 여론이 형성되어 진행된, 영화 내적 문제에 대한 거부였으며 또한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보다 이성적인 거부였는지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씨네21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불한당>에 침묵하고 <군함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길 선택했다. 씨네21의 '비평'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여러 측면에서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나로서는 어째서 씨네21이 <군함도>만을 이리도 전투적으로 옹호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단지 류승완과 그의 인맥이 한국 영화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엄청나며 그 가지가 씨네21에도 뻗쳐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허나 나에게도 분명히 보이는 것은, 씨네21이 비평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 침묵과 옹호가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단 한 번도 비평지였던 적이 없으며 그나마 '비평'을 내걸던 글들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한참 되었으나, 이젠 그 존재의 가치조차 의문스러운 이 씨네21이란 잡지에도 굳이 비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런 비평은 그 천박함과 비겁함 때문에 우리가 가장 지양해야 할 모델로서의 비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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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약 씨네21이 <군함도>를 '지키지' 않으며 <군함도> 논란에 제대로 임하고자 했다면 <군함도>에 부정적인 의사를 지닌 이들 역시 인터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이들은 류승완 본인과 그의 지인들 아니던가? 심지어 박찬욱과 봉준호는 류승완의 '진심' 같은 우스꽝스러운 언사를 내뱉고있다. 천박한 알탕의 장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