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아름 혹은 유머

행진하는 영화 2017. 9. 9. 19:03

* 이것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초고이다. 글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기에, 이 글을 백업한다.


 

결국 유머란 견고하게 세워진 픽션과 픽션들 사이를 관통해 구멍을 뚫는 화살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픽션이란 무엇인가.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만이 픽션이 아니다. 인위적인 '가상'의 논리가 곧 픽션이다. 그렇다면 구멍이 뚫린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것은 곧 픽션이 픽션으로서 실패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픽션이 그 구성의 기반으로 삼은 '사실'의 논리가 사실 '사실'이 아님을 폭로하는 순간이기에, 훌륭한 유머란 (표적으로서의 픽션에 대한 '공격'의 정확도를 위해) 심각함과 태연함을 겉에 두른 채 픽션들이 선 고정된 지각을 흐트러뜨려 개중 무능한 픽션을 폐기하고 '사실'적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훌륭한 픽션을 유지 및 각성시키는 힘을 지닌 것일 터이다. 앞서 "훌륭한"이란 형용사가 각각 "유머" "픽션" 앞에 붙은 채 반복되었는데, 이 반복은 유머 역시 결국 어떤 인위적 논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즉 유머의 토대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유머가 유머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 한 유머란 성공적인 유머일 수는 없다.

 

유머란 예컨대 농담처럼 단발적으로 웃음을 유발하고선 명멸하는 이미지, 혹은 웃긴 것 뿐만이 아니라 태도, 방법론, 혹은 더 나아가 이념 역시 포함하는 것으로, 이 태도의 가장 명시적인 예로 우리들 중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 중 하나인 홍상수의 근작 <그 후>를 떠올리는 게 좋을 터인데, 극 중 김민희가 분한 아름은 봉완(권해효) "그럼 아름이는 뭘 믿어?"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거.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것. 이 세상을 믿어요" 여기서 두 번째와 세번째 사이에 "그렇기에"라는 연결사가 괄호쳐진 채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앞의 두 믿음이 일종의 조건으로서 충족되어야만, 세계를 긍정하는 세번째 믿음은 가능해질 수 있다.

 

개인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혹은 '살아있음'이란 상태에 어떻게든 집착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제아무리 초월을 추구한들 결국 '세계'의 절대적 영향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계의 존속과 재생산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세계'가 진행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완전무결하게 확정된 주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불가능성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주체이고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라는 태도, 곧 유머이다. 아도르노의 말, "즉 어떤 한계를 설정하게 되면 그러한 설정을 통해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봉완이 되새긴 "내 인생은 포기하자"라는 주문 역시 불가능성의 직시라는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유머러스하다 오해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의 딸의 아버지라는 한계 설정은 (봉완 스스로 인정하듯) 자기파괴를 향하고 있지 아름의 경우처럼 자기해방을 향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사태의 책임을 모호한 언어로 비켜가려 하는, 경멸스러운 자아방어기제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름이 내뱉는, 불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언어는 봉완을 필두로 한, 상황의 표면에 대한 자신의 (증명되지 않은, 혹은 원하는) 주관을 앞세우며 비틀린 시간 속에서 '나가지 않는' 고착을 선택한 극 중 인물들과는 아름이 전혀 다른 성질의 형상임을 예고한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이라고 해야하는 건, 본작에 등장하는 유리문들, 특히나 때에 따라 투명도를 달리 하며 때로는 심연의 색을 입는 출판사 사무실의 그것이 거의 입()만을 허용하는 경계로서 작동했으며 오직 아름만이 출입구로서의 유리문들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멍을 뚫고 그 사이를 유유히 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지극히 반골적인 작가라면 이는 그가 소위 지식인 남성들의 찌질함을 폭로함으로서 남성 중심적 세계를 저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앞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 인물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프레임과 씬의 배열을 통해 은연중에닫힘을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고정적인 가치(언어, 시간, 현실, 표면 등)를 거부하며 그 영토들에서 탈출하거나 대안을 갈구하는 방식으로 위계를 생산하는 관념적 토대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홍상수의 세계에서도 <그 후>에서 만큼 자유에의 추구가 격렬한 파열음을 냈던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