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취당한 말들: 4/16

대충사는 이야기 2018. 4. 21. 01:30


그러니까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이미 세상에 있던 것을 어떤 상황에 맞추어 재조직할 때, 그 말은 설명되지 않던 실재를 설명할 수 있게 하면서 기존에 우리를 가두던 우리를 자각하고 그 바깥의 영토를 겨우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말의 체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말을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부정적인 말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든 이는 동일하다 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더 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다. 예컨대 '아재'라는 말이 사용되는 양상을 들여다보자. 본래 '아재'란 중장년 남성을 칭하는 말인 '아저씨'의 낮춤말로서 이들의 우스꽝스런 추태를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한 지칭대명사로 인터넷상에서 사용되었으나 어느 새 '아저씨'들이 스스로를 여전히 재치있고 흥미롭고 '젊은' 층으로 꾸미기 위해 쓰는 지칭대명사가 되어버렸고, 아재 온라인, 롯데리아의 아재버거, 김수박의 <아재라서> 같은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본래 '아재'를 풍자의 목적으로 사용하던 이들은 이전에 '아재'라 부르던 층을 지칭하기 위해 '개저씨'라는, 좀 더 직접적인 욕설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보다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한 둘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 및 지향성을 타인에게 밝히는 것을 이르는 말인 '커밍아웃'은, 예컨대 '덕밍아웃'같은 파생어들에 의해 본래의 이데올로기를 희석당한 채 기껏해야 '숨기던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곤 하며, 강간 문화의 폐혜를 비판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운동을 지칭하는 말인 '미투'는 '미투 가해자(혹은 피해자)' 따위의 기사 제목이나 대화, 혹은 '미투'를 이용한 캐치프레이즈의 범람 속에서 오히려 운동의 쟁점인 성폭력과 성폭력을 가능케 한 강간 문화의 힘을 담론장에서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 말들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전혀 반대의 의미로 (오)작동되고 있는 현상은 이전에 말이 지배세력에 의해 (오)작동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이래로 '노동자' 대신 '근로자'가 표준어로 지정되어 주로 쓰인 것은 자본이 말의 이데올로기-논리를 은폐하고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이데올로기-논리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즉 논리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싸움. 


그러나 현재에 이는 말의 홍수 속에서 말의 실재감과 실재의 폭력을 표백하고 일말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회가 나름 용인할 수 있는 '안전한' 수준으로 말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적극적으로 재전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 때 소수자들이 (폭력을 무화하기 위해) 취했던 말의 재전유 전략이 역으로 지배세력에 의해 (논리를 무화하도록) 쓰이는 것. 즉 논리 자체를 극단적으로 범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오늘날 말이 비정치적으로 정치화되는 방식이다. 이제 지배세력에겐 말을 은폐할 필요조차 사라진 게다. 앞서 말했듯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어떻게든 탈취되어 무기로서의 능력을 상실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무기가 더 남아있을 수 있나


눈에 걸핏하면 치이던 '헬조선', '세월호 이후' 등의 말들을 언제부터인가(라곤 하나 실은 정권 교체 이후부터) 신문 기사나 문학 잡지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어쩌면 이 방식의 한 결과가 아닐까? 정권 교체를 제외하고는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이루는 대부분의 주요 사안들 제대로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은밀하게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 정권 교체 직후 이 말이 갑작스레 시야에서 지워진 것을 보며 나는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따지는 게 벌써 낡아버렸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유한국당? 조선일보? 허나 삶의 도처에 있는 폭력을 지시하기 위해 창출된 말이 언론과 지식인들이 내걸던 어떤 정의에 의해 외려 남용되고 그 정의의 적당한 유효기한이 끝나자마자 버려질 때, 그래서 말의 실재감이 기껏해야 거품 낀 유행어의 그것 수준으로 추락한 듯 보일 때,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을 막고 말의 자리를 따져야 할 이들이 역으로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에 일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한다. 말을 탈취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지배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의에 도취된 '선인'들이기도 한 것이다.

책임자는 어디있나?: 3/22

대충사는 이야기 2018. 3. 29. 01:46


처음에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통쾌하고 유쾌하여 한 번 더 웃었다. 생중계되던 그의 집앞 상황을 보면서는 흐뭇함이 넘쳐흘렀다. 한 손은 리모콘을 들고서 생중계의 다양한 판본들을 훑느라 바빴고, 다른 한 손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이 소식을 전하고 기쁨을 공유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그가 서둘러 탄 검찰 호송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몸 속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심히 거슬리는 게 느껴졌다. 까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컥거리기도 하는 것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역한 신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만연하던 통쾌함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죽고 답답함이 이를 대신해, 빠르게 움직이던 양손은 단말기들 앞에서 초조하게 머뭇머뭇거렸다. 답답함? 그렇다. 물론 10년 전의 한 줄기 물대포로 나의 청소년기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명박의 구속에 기쁨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기쁠 수도 없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이젠 이명박마저 구속됐다. 물론 세상은 아주 조금 바뀌었으며 또 바뀌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이명박은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국정원 특활비 등 돈에 얽힌 수 많은 비리들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당장 그가 받고 있는 혐의는 약 20가지나 된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유죄는 그 누구의 미래보다도 또렷한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엔 (아직?) 용산, 밀양, 쌍용차, 강정 마을이 없다. 이 이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통령' 이명박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표적인,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들. 여전히 나에게 이명박이란 이름 세 자는 저 사건들과 오버랩 되고있는데, 이 이름들을 거론하지 않고, 그 책임을 묻지 않고서 이명박을 청산한다는 것이 대체 가능한가? 나에게 그런 "청산"이란 지난 5년의 책임에 대한 청산으로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하는, '발라버림'식의 복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의 구속 만으로 기뻐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르다. 


만약 이 구속을 그 자체로 변화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결코 바뀌지 않을 세상의 안전장치로서 미약한 변화에 불과하리라. 이 주장이 너무 나간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우리 주변에는 이 구속을 전적으로 자신들의 공이라 자랑스레 떠들며 만족스러워하는 이들이 넘쳐나지 않던가. 변화를 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균열을 내지 못할 수준에서만 허락되고 있고,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바꿀 만큼 전복적이었던 위세는 어느 새 '여기서 뭘 더 바라냐'고 대답하는, 지극히 반동적인 위세로 바뀌었다. 지난 10년 간의 운동들이 복수의 일차적 완수 앞에서 간단히 지워질 때, 실은 세상은 변할 리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 그 누구도 이름 지워진 사건들에 대해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대체 우리는 무얼 위해 싸웠던 것일까. 나는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대체 책임자는 어디있나? 책임을 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 누구도 책임에 관련하지 않게 되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 새 그가 탄 차가 동부구치소 내부로 사라졌다. 그래도 기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몸 속 깊이 응어리진 분이 나를 괴롭혔다. 

2017년을 마치며: 공중의 편지

대충사는 이야기 2018. 1. 1. 11:02

올 한해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써봅니다. 왠 뚱딴지같은 편지냐며 갸우뚱할 당신의 얼굴이 벌써 선합니다만, 이건 저의 오랜 버릇 중 하나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재미없는 걸 못 버티는 버릇 말입니다. 똑같은 형식의 결산을 매년 고지식하게 되풀이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재미없는 짓이지요. (물론 쓰는 사람은 편하고 보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더 쉬울테지만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굳이 이 편지를 써 당신께 부치기로 한 게죠. 물론 그 사이에 이 결정을 가능케 한 사고의 과정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이전의 결산과는 다른 방식의 결산에 무엇이 있나 하며 고민하던 와중,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던 토픽 중 하나인 편지를 떠올렸지요. 편지의 특이성을 직접 체험하자, 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예 편지를 써보자!라는 결심이 이 결정과 결과물이 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제가 올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의 리스트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지난 한 해동안 천착했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한다는 의미에서도 결산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를 사로잡은 세 가지 토픽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지-서간체요, 둘은 (지금 여기서의!) 페미니즘 운동이요, 셋은 트렌드로서의 회귀였지요. 이 중 세번째에 대한 생각은 이미 당신께서도 읽으셨을 졸문 '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을 통해 맛보기로 논한 바 있으니, 여기서 굳이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몇 마디만 덧붙이자면, 저는 이 현상이 역사적 망각과 '신화'의 재생산의 상호보완적인 체계 속에서 '추억'이랄 것의 흔적이 거의 지워진 시대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과 공명하는 징후는 아마도 물성에 대한 고집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습니다. 역시 결국엔 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돌아온 거죠. 이에 대해선 언젠가 아주 길게 논할 자리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편지였는가? 라는 걸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사실 편지란 참 이상하지요. 이 때 편지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표현 양식으로서의 편지를 이르는 것입니다만, 이 편지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수신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그저 '이건 편지다'라고 생각하며 수신자라는 텅 빈 항을 의식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편지가 편지''으로 쓰여버린다는 게, 그렇게 성립되어버린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당장 이 편지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 즉 수신자란 나의 애인일 수도 있고, 나의 오랜 친구일 수도 있으며, 내가 얼마 전 연을 끊은 누군가일 수도 있지요. 혹은 내가 모르는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답신이 오지 않을 수 있고 아무에게도 답신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편지가 편지로서 성립되는 데에 그 어떤 지장도 되지 못하지요. 여기서 두 명의 자크가 (서로 '따로 또 같이') 배달 불가능성이라 지적했던, 편지라는 표현 양식에 내재된(혹은 내재될 수 있는) 탈구축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편지란 말하자면 '열려있는' 에크리튀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열려있음이란 수 많은 '' 사이의 수 많은 간극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고 진동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 간극들 중 하나인 시간성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편지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시차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그 존재가 정당화됩니다. 하나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시차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 시간과 이야기 시간의 시차이지요. 이를 (타자에의?) 간섭 불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얼핏 유사해보이는 표현 양식인 1인칭 소설이나 강연문과는 다른, 편지-서간체만의 위상을 만든다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발신자의) 과거가 (여러 측면에서) 비가시적인 (수신자의) 미래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말을 거는가하면, (서술 시간의) 과거가 (이야기 시간의) 대과거를 소환해 개인적인 경험을 새로이 풀이하며 미래를 향한 공통의 ()체험으로 변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편지란 이러한 간섭 불가능성의 시차가 공통의 평면 위에서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혼합하며 공존하는 '가능성의 상태'에 다름 아닌 겁니다. 가장 단순해보이는 이 표현 양식이, 실은 구조적으로 고도로 착종된 형태인 것이지요. 아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군요. 그 착종으로 인해 풍요로운 단순함을 얻었다, 라 말하는 게 적합해 보입니다.

 

모두들 작금엔 편지 따윈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작금"이 이메일이나 PC통신, SNS의 시대를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찍이 60년대에 아도르노는 서간체란 낡았다고 한 바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편지 문화가 암묵적으로 승리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 봅니다. 애초에 중세 이전에는 편지란 소식을 전하는 배달부, 즉 간극을 연결하는 선()으로서의 인간매체를 지시하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더 나아가 플루서는 아예 마리아의 잉태를 전하러 온 가브리엘의 복음적 성격을 들어 그를 편지로 인식하기도 했구요. 매체사 관점에서 볼 때 편지는 종이 필기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문체론적 기능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지금 디지털 문화 안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을 띄는 게지요다만 이젠 장문의 편지 양식이 아닌 엽서 양식이그것도 편지의 존재를 가능케하던 시차가 거의 지워진 -이 편지만 해도제가 '발행'을 누르는 동시에 당신께 (물리적으로도착할 수 있지요것이 새로운 편지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카라타니 코진이 나쓰메 소세키를 논하면서 "소세키의 18세기적인 부분이 21세기에 있어서 더욱 더 새로운 의미로 살아날 것"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편지의 '단순한' 가능성이란 아직도 미래를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올해만큼 대외적으로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강력하게 부상해 사회적 노이즈를 일으킨 해도 없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이것도 제가 앞서 비판한 역사적 망각의 한 예에 불과한 걸까요? 하지만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이후의 할리우드를 떠올리면, 혹은 유아인의 '애호박 게이트' 이후의 판국을 떠올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전에 이런 일들이 폭력으로서 이 정도로 공론화되어 문제시된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담론의 지형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게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여기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며 논하고 싶은 건, 이러한 양상을 그저 '시대가 바뀌었고 씹치들은 도태된다(혹은 그럴 것이다)'는, 거의 무지성적으로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는 관점들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바로 전형적인 '사이다' 전략이지요. 정치와 윤리(적 '캠페인')를 헷갈린 채,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막연히 중얼거릴 뿐인. 그러나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두려워하거나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필요만 있을 뿐"이지요


2015년부터 거의 폭풍같은 속도로 가시화되어 지금은 한국 사회의 주요문제적 담론, 아니 전선 중 하나로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 왜 하필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체계를 파악하지 않고선 다음 단계의 투쟁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섣불리 상처에 대한 동감을 논하거나 (이 방향은 고통 자랑과 복지론으로 추락할 위험이 상당하지요) 혐오와 유교간의 커넥션 운운하며 미개론을 펼치거나 (이 논리로 국제적인 동시성을 지닌 흐름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혐오를 그저 일관된 형태로 보는 것 (가부장제의 권위의 점진적 붕괴 '이후'의 양상 -예컨대 성재기!- 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었지요) 은 질 나쁜 농담에 불과하지요. 아니면 '진보 계몽 운동'의 축소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으려는 착실한(!) 시도이거나. '우리는 옳다'는 '캠패인적' 사고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경제, 계급, 세대 중 한 축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인 혐오'논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리 활성화될 수 있게 된 정황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투쟁의 구체적인 방식을 재고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급하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젠더 퀴어 담론이 최근 트위터 내에서 활성화된 것, 그리고 그럼으로서 ('상호교차성'이라 불리는) 소수자 담론의 내포와 외연이 어느 정도 확장된 건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만, 혹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신지 궁금해지는군요. 물론 당연하지만, 저도 이 지점에서 정말이지 열심히 해야합니다. 저 역시 여기저기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실 이 두 문단은 저 자신에 대한 꾸짖음에 가깝습니다.


다소 개인적인 얘기로 이번 편지를 끝맺을 준비를 해볼까요. 올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해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얘기이기도 하고, 저 자신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건들에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넘쳐난 해였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허한' 이미지였습니다. 어느 늦은 밤 퇴근길에 인적 없는 골목길을 가로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건물에 불이 꺼져있고 적갈색의 벽돌엔 낙서가 빼곡하여 참으로 을씨년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거기엔 그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왠지 모를 익숙함과 위화감이 있어 저를 서서히 휘감았습니다. 한참을 걷고 돌아보고 난 뒤에야 저는 그곳이 폐쇄된 재개발촌이며, 제가 아직 운동권이었을 적 어떤 재개발 반대 집회에서 연대 발언을 한 적이 있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곳곳에 붙어있거나 땅에 힘없이 널부러져있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강력하게 지시했지요. 그 이미지는 참으로 공허한 곳에서 참으로 공허한 기억과 결부되어, 그 공허함을 통하여 저의 닫힌 과거를 끌어올렸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비로소 스스로의 시간이 운동의 계절을 지났음을 실감했습니다. 앞서 "닫힌 과거"라 말한 이유는, 근 1년간 제가 오랜 기간 몸 담았던 모든 운동 단체들과의 연을 끊고 소액 후원자 및 지지자 정도로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거리로 나가 '동지'들과 함께 차벽과 방패들에 몸을 던지거나 밤새 농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 1년간 그럴만한 사태가 (거의) 벌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저는 이젠 운동권이라 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있었지요. 이는 지난 2016년의 결산에서도 밝혔듯 운동권 내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지난 촛불 정국이라는 '사건' 때문이라 해야하지요. 벌써 심적으로 지나치게 까마득하군요. 박근혜의 탄핵 선고로부터 이제 9개월이 채 안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혁명적인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이진 않았고, 본질적으로 반동적/식민적이었다 해야지요- 정국 속에서 태어난 이 반동적인 '새 시대'가, 저에게는 차라리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공포? 예, 그렇습니다. 내가 거리에서조차 언제든지 얼마든지 부정되고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말입니다(당연하지만 이것은 '보편윤리' 운운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런 감상은 '새 시대'가 저에게 억지로 안겨준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흐름을 앞에 둔 저에게는 더 이상, 혹은 최소한 지금은 거리로 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가득 찬 거리가 무섭다기보다는, 그 속에서 더 이상 '소란스러운' 소속감-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게죠. 그래서 저는 이제 오롯이 홀로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바람에 실어날린 고엽처럼.이게 정말 괜찮은 삶인지, 타인에게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올바른 처사인지 하는 생각이 종종 피어오르긴 합니다만...


이만 이 어지러운 첫번째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당신에게 답신이 올 일은 전혀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를 계속 쓰긴 쓸 생각입니다. 다음 편지들과 한참을 미루고 미룬 글들을, 가능한 빨리 완성해 부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생각대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 다음에 또 소식 전하지요. 



12월 31일



 

p.s.


올해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존 버거, 지그문트 바우만, 제리 루이스, 제임스 로젠퀴스트, 타니구치 지로, 프로디지, 그웬 아이필, 척 베리, 조너선 드미, 츠베탕 토도로프, 존 애쉬베리, 홀거 추카이, 예브게니 옙투셴코, 박상륭, 류사오보, 케이트 밀레트, 박종필, 플로 스타인버그, 스즈키 세이준, 조동진, 린다 노클린, 토브 후퍼, 마츠모토 토시오, 미카 바이니오, 다커스 하우, 조지 A. 로메로, 팻츠 도미노, 밀드레드 드레셀하우스, 해리 딘 스탠턴, 다니엘 다리유, 그리고 이스탄불, 라스베가스, 모가디슈의 익명들. '지랄같았던' 작년 이상으로 망연한 해였다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더 많은 죽음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