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원리: ooo의 만화에 관하여

MA 2018. 8. 5. 22:10


ooo의 만화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마치 <치는 만화>에서 예상을 배반하는 스트라이크를 성사시키는 볼링핀들처럼 인물이 처음에 지녔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패하고, 발화되었던 말은 반복되면서 본래 취했던 의미를 상실하고 배반한다. 설명과 소통의 구체성이 부재하는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미끄러짐은 필연적인 사태일 것이다(그리고 언제나 그 미끄러짐이 실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것 뿐인가? ooo의 인물들은 단지 상황의 애매모호함에 의해서만 미끄러질 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모든 작업은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 ooo의 작업들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인물도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명탐정 고난>의 첫번째 컷에서 세 인물은 한 원 안에 모여있었는데, 마지막 컷에선 그 원은 온데간데 없고 넓고 각진 바닥만이 그들을 받치고 있다. <Ok go>에서 택시를 잡고 출발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첫번째 컷의 파란 하늘이 세번째 컷에선 노을로 바뀌어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작품에서 매 컷마다 배경을 이루는 색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있다. 산만하다 해도 좋을 정도의 구성. 그러니까, ooo의 인물들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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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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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국내에선 '응답하라' 시리즈가, 해외에선 <기묘한 이야기>가 그러했듯 근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상 매체들이 도착적으로 보일 정도로 해당 시대의 문화적 요소들을 과시적으로 배치했을 때도, <시그널>이 2.35:1 비율의 영상을 16:9로 스트레치해 아날로그 시대('를 다룬'이 아닌)'의' 영상을 구현했을 때도, <라 라 랜드>가 최후반부의 회상에 디지털 카메라도 아닌 8mm 필름의 화면을 사용했을 때도, '구닥 캠(Gudak Cam)'이라는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이 필름 카메라의 영롱한 색감을 모방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3일 뒤에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의 번거로움마저 모방했을 때도 이 질문을 명확하게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전 시대의 복고와는 다른, 괴상한 복고의 징후가 소위 '포스트 미디엄 시대'의 여기저기서 엔트로피처럼 번지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카드캡터 사쿠라>와 <프리크리>의 시퀄이 공개된다고 했을 때, <교향시편 에우레카 세븐>의 본편 10년 전 사건인 '퍼스트 섬머 오브 러브'를 다룬 프리퀄이 극장판 삼부작으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봉신연의>가 애니메이션 20주년을 맞아 리메이크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은하영웅전설>이 여명편부터 새롭게 애니화한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 유아사 마사아키가 넷플릭스에서 데빌맨 리메이크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이 아니메들이 2018년에 제작 혹은 공개된다고 했을 때 나는 이 혼란스럽게 펼쳐진 성좌들이 그리는 과거의 형상 앞에 멍하니 서서 이렇게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 질문을 재패니메이션에 한정시켜 진행하고 싶다.


이 현상은 분명 어떤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향수라는 욕망이 문화에 투영되던 양식으로서의 복고에 그치지 않고서 말이다. 허나 여기서의 변화란 '진보'가 아니라 '진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철저하게 반 진보적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어디론가 회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 "어디론가". 정확한 좌표의 서술이 부재하는 단어. 선술한 애니메이션들의 명단의 나열만 보더라도, 이 예기치않은 리부트 현상이 특정 세대가 기성 사회에 안정적으로 편입한 결과 때문이라고는 쉬이 말할 수 없다. 간단하게 제작 연도를 비교해보자. <데빌맨> 시리즈가 마지막으로 영상화된 것은 요조시레누편 OVA가 발매된 1990년이었다.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판의 마지막 외전 OVA와 <카드캡터 사쿠라> TVA가 제작된 것은 1999년이었으며, <교향시편 에우레카 세븐>은 2005년에 공개된 작품이다. 


여기엔 약 15년이라는 간극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최소 15년의 간극이 있다. 구체적인 공통분모 없이 '과거'란 이름으로만 묶이는 이 간극. 헌데 이 간극을 무시하고 이 현상에 대해 말을 얹는 것이 가능할까? 이 현상은 '토토가'가 아니다. 특정 세대에 호소하기 위한 기획이라고 말하기엔 그 타겟으로서의 '특정 세대'가 정확히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상을 무한히 넓힌 타겟팅을 취해 명작의 귀환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에 다시 불러오고있다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로 여기서 아날로그 따위의 말을 얹는 것은 그야말로 무용하며 더 나아가 무지하다) 당장은 무작정, 혹은 무차별적으로 "어디론가" 회귀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복고나 향수가 아니라, 말 그대로 회귀다. 물론 '토토가' 역시 90년대 TV 영상 문화 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 조건들 - 4:3 비율 화면, 투박한 CG와 타이포그래피 - 까지 재현하긴 했으나 그 재현이란 것을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수행하며 이런 기획의 지속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재빨리 현재로 돌아가(려)던 것과는 달리, 리부트되는 최근 애니메이션들의 재현은 거시적으로는 n기를 제작하며 지속 가능한 기획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미시적으로는 과거의 서사에 대한 재현 자체를 자신의 근거로 삼고 더 나아가 존재 양식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본편의 타임라인을 기준으로 그 전 혹은 그 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과거를 향해 뚫린 구멍 자체가 이 시대에 '새로운' 문화 모델의 통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4~5년에 공개된 바 있는 <디지몬 어드벤쳐 tri.>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크리스탈> 1, 2기의 상대적인 흥행 실패와 저평가는 사실 이상한 사태가 아니라 당연한 흐름이라 봐야한다. 두 작품을 둘러싼 시청자들의 불평이 주로 원작의 작화와 캐릭터 묘사와의 불화에 집중된 것은, '오타쿠'들이 세계관 설정과 '귀여운'(可愛い) 작화에 집착하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과잉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원작의 그림체를 따와 저 리부트들의 그림체를 '수정'하기도 했다. 원작의 디테일의 재현에 대한 집착. 달리 말하자면, 과거의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부정의 시도가 역으로 부정당한 것이다. 차라리 이 현상을 작동시키는 핵심은 과거를 긍정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과거밖에 없다는 주문이다. 아무래도 이 주문은 제작자와 수용자 양측 모두에게 내파된 듯 하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새로운 '매체'(로 오인받는) 넷플릭스 역시 <데빌맨>으로 이 판세에 뛰어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2020년에는 테즈카 오사무의 원작 <지상 최대의 로봇>을 우라사와 나오키가 재구성한 <PLUTO>가 8부작 애니메이션화된다. 점점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리부트되고, 그 대상은 점점 더 과거를 향하려하며, 새로운 매체들은 이를 '새로운' 양식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 회귀는 어딘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애니메이션, 혹은 더 나아가 영상 매체들의 발악인가? 


잠깐, 당연하지만 이 글은 이 현상을 부정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독해했다면 당신은 나의 논점으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 현상 자체가 어떤 묵시록적인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정성일의 <아바타> 비평을 생각하며 말하는 중이다) 허나 무턱대고 긍정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다만 나의 우려는 갈수록 이런 애니메이션들이 늘어나, 징조에 그치지 않고 회귀라는 현상을 이룬다는 데에 있다. 이것들은 지금 자신의 새로운 길과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과거를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삼아버리는 과도기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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