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경험에 대하여

대충사는 이야기 2015. 3. 22. 21:00


 직관은 감성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국한돼 있는 한에서의 직관은 감성적이지만, 선험적인 직관은 능동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달의 한쪽 면만을 볼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달의 반대쪽 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의 능동성의 간단한 예다. 또 이것은 동시에 선험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달의 반대쪽 면을 경험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직관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추리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달의 모습, 즉 형태, 색상 등등 여러 감각적 성질들은 그것에 신경쓰인 인간에게만 존재하지만 달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입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에 관여하는 부분은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순전히 존재의 형식일 따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달을 지각했을시의 형상과 지각하지 않았을 때의 달의 형상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두 점 사이에서의 직선은 가장 짦은 선이다'의 명제는 경험 판단입니다. 기하학에서의 모든 대상들은 우리에게만 존재하며, 우리는 실제로 직선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선을 그려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감각에 의해 직선과 근접해 있는 선을 직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와 즉 공간과 다른 어떤 곳의 공간에서는 이 명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든 선험적 인식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직관과 사고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올바른' 감각적 인상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자체가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만약에 시간과 공간의 표상이 우리에게 부재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일해 질 것이다. 그러나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경험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이 불가능해 질 것이다. 순수한 선험적 인식은 존재하지 않다.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경험적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선험을 지칭한다.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진상이 오직 경험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경험하지 않고도 무엇을 직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으니. 우리에게 순수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의 능력에 자연의 법칙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간다는 사실에 있다. 경험적 직관은 단적으로 하나의 상이다. 그리고 경험적 직관은, 칸트가 말했듯 항상 수용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어떤 하나의 상을 산출해내는 능력이 존재한다. 스스로 전체인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학문의 진보는 단적으로 이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개념적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순해질 것이며, 또 학문이나 역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적 인지능력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기억과 직관의 인과성에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개념 능력이 거의 없는 동물들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이다. 동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적 인지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동물은 직관에 의한 인과성에 대한 포착과 희미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명 동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표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물은 충분히 현실적으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경험의 전후에 대한 시간적 관계를 단수나마라도 포착할 수 있다. 시간 표상이 없더라도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지각은 광상곡이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라도 경험은 가능하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짧은 생각

행진하는 영화 2015. 2. 26. 09:36


얼마 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을 뇌내재생하다가 이 영화가 끊임없이 극단의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옥같은 더위로 가득 찬 평민들의 땅과 에어컨이 있어 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향유할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성, 불이 꺼진 방과 불이 켜진 방, 딱딱하고 비싼 구닥다리 구두를 파는 늙은 부르주아와 싼 엉터리 구두를 팔려는 (상대적으로) 젊은 부르주아들, 아들을 잃었으나 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기사와 모든 걸 가졌으나 돈을 내지 않으면 한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임을 아는 갑부 곤도(이 둘은 서로 멀리 떨어진 반대편의 벽 만을 바라보며, 또 곤도가 기사에게 다가가면 기사는 그 자리를 피한다), 아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버리려 하는 기사와 돈을 위해 아이를 버리려 하는 비서(이 둘은 옷 색도 백과 흑으로 대비된다), 편히 앉아있다가 커튼을 열자 숨기 위해 바닥에 누워버리는 형사들, 끈질기게 한 공간 안에서만 전개되는 전반부와 끊임없이 공간을 바꿔나가며 진행되는 후반부, 선한 부르주아인 곤도와 악한 프롤레타리아인 범인, 결국 마지막까지도 극단의 상황에 대한 화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둘 사이의 간극만을 재확인하게 만들며 (초반부 갑부의 집의 '커튼'이 세로 방향으로 닫히는 것과는 상반되게) 가로 방향으로 내려가 둘 사이를 단절시켜버리는 '셔터'. 영화는 이렇게 두 이미지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결국 이 세상에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처럼. 물론 단 두 번, 갑부의 아들과 기사의 아들의 옷이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장면과 범인이 갑부와 마주하여 담뱃불을 빌리는 장면에서 구로사와는 이 두 계층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그 장면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버린다. 결국 한 아이는 사라지고, 한 남자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서로의 깊고 넓은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좁혀지지 않는 이 간극은 <거미의 성>이나 <란>의 절망 보다도 더 염세적이고 고통스럽다. 대체 구로사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구로사와의 가장 끔찍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