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흐뭇하게 만끽하다 문득

대충사는 이야기 2018. 10. 6. 23:14

3.


<필름 소셜리즘> 1부 이래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 생산 기제와 방식들을 거칠기 짝이 없게 잇고 뒤섞어 시청각적 '난장'을 야기하는 -(앙드레 지드의 <희망>을 경유하는 <영화의 역사(들)>을 경유한)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지의 우정'의 디지털적 연장선일- 장 뤽 고다르의 방법론을 디지털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이미지들의 '연대', 곧 해체적 바로크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지털의 폭력이 야기한 '바로크적 난관'을 해체하기 위한 바로크. 지금 고다르가 적으로 삼은 '바로크적 난관'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텐데, 하나는 이음새라는 단어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실제 배우들과 가상의 미장센을 한데 매끈하게 섞어 무한한 스펙터클을 펼치는, 디지털화된 '신화적' 블록버스터들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파편들을 동일한 연속선상에 '산만하게', 허나 '흥미롭게' 배치하여 인간의 감각을 끊임없이 낚아채는 충격의 연쇄이다. 하지만 둘 모두 모든 것이 동일하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적 자율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문득 그가 <언어와의 작별>이 공개되었을 즈음의 인터뷰에서 SMS(Short Message Service)를 "내 영혼을 구해줘"(Save My Soul)라는 구조 신호로 읽은 게 생각난다. "연결된 소외"...) 이에 반하는 고다르의 바로크란 바로크하면 흔히 떠오르는 방식인 탈중심, 탈경계의 과잉에 그치지 않고서, 특정한 '제도'(자본? 혹은 영화?)의 구조적 모순 안에 갇혀있을 때 서로 상이한 '문제'들에 있어 그 상이함을 엄격하게 고수한 채 서로 관계시키면서 거기서 생겨나는 부조화의 노이즈를 이용, 구조적 모순의 원리를 외려 극대화해 '제도'에 내파시키는 극한의 수사법으로서의 '난장'이 된다. 요컨대 '제도'가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문제들의 계열을 불편하게 '덩어리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이미지 생산 기제가 능동적으로 범람하고 뒤섞이는 작금에 들어선 더더욱 심화되어 아예 양쪽 눈에 다른 상이 비치게 만들곤 하는 3D 영화 <언어와의 작별>에까지 이른 것이고. 바로 그런 점에서 고다르는 바리케이트 너머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비판자 내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 치밀한 '바보'이다. 어쩌면 고다르가 최근들어 '은유'를 더욱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디지털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고뇌의 결과일지도. 


2004.


'영상'에 있어 촬영도 보관도 상영도 모두 디지털로 행해지는 작금에 강한 반감을 갖고서 전적으로 역행하(려)는 필름 추종자들을 어리석다며 비판하는 이들이 그러한 필름 추종자들의 대표로 쿠엔틴 타란티노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호명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필립 가렐이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언급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필름의 힘'을 믿고서 최근까지(그리고 아마 가능한 앞으로도) 꾸준히 필름으로 작업해온 감독들이 아닌가? 물론 이런 비판은 대부분 '거대 사업'으로서의 영화 제작을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그 무의식에 달리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작가'에 대한 예우? 그들은 다르다는 직관? 


2004.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SNS가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아닐까. 전자는 후자로 인한 불안을 떨치기 위한 강박관념, 즉 SNS가 형성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의지'리란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광학적 미디어에 대한 (얼마 전 타계한) 폴 비릴리오의 말을 필두로 한 여러 미디어 연구자들의 말을 스치듯 떠올리는 중이지만, 당장 관심이 가는 것은 SNS라는 '공론장'을 이루는 말들이다(물론 키틀러가 말했듯 결국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있지만...). 그 파편적인 담론들. 아니, 담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파편들. 이제 우리는 '플로우'에 늦는다는 것을 거의 죄악처럼 생각하며, 죄악 없이 살기 위해 열심히 가능한 많은 사안을 퍼나르고 떠들며 개입하고 그렇게 자신의 임무가 끝난다고 생각해 재빨리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나 외부자로서 알 수 있는 것만을 따질 뿐, 모를 수도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행동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될 터이며 정말로 문제의 세부에 닿아 그것을 뒤흔들 수 있을지에 대해선 충분히 판단하지 못한다. (최근들어 자주 보이는 "근황"이라는 단어는 이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사건들은 스마트폰의 크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의 길이와 크기를 자꾸만 줄이고, 그래서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내리면 그 사건들은 외화면 따위 없이 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엄격한 의미에서의 담론은 빠르게 설 자리를 거의 잃어버리고 단발적이고 강렬한 말, 이미지, 감정의 향연이 영토를 불안정하게 지탱한다. 기사 링크를 퍼나르면서 정작 기사는 읽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연결망의 무한한 자율성이 알고자 하는 의지를 이름의 수집에의 의지로 전환해버린걸까. 여기서 아이러니 하나. SNS 안에서 서로 대적하곤 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디스패치, 인사이트류의 황색 언론은 어느 순간 기괴하게 마주서서 공명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심을 이용하각자의 '윤리'적 태도 -전자라면 비율 맞추기, 후자라면 알 권리에 대한 신봉 - 로 문제들의 구체적인 결을 쳐내고 제도를 향해 적극적으로 투항하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이라면 여기서 내가 누누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시리라. 작금에 자유나 개성은 구조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기제가 되었다.


96.


문학동네 「2018, 퀴어전사 ―前史·戰史·戰士」를 읽었다. 문학의 장 -물론 여기에만 머무는 건 절대 아니다- 안에서 퀴어는 구조 바깥에 존재한 채 구조에 맞서는 드라마틱한 투쟁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왔으나, 실은 이 투쟁이란 구조를 뒤흔드는 유효한 저항이 아니라 구조가 그들에게 허락한 유일한 재현 방식이었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 주장이다. (실제로 퀴어는 종종 '지성 시장'에서 반-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 쓰이곤 하지 않는가? 그것이 추상화든 구체화든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조에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김건형은 이를 일상이라고 '상상'한다. 투쟁적 주체가 구조가 형성한 재현의 틀을 작동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차라리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존재로서의 퀴어를 구성하는 것이 유효한 저항일 수도 있다는 게다. 개인적인 해석을 곁들이자면, 구조가 바라는 '보편'의 일상이나 세속과는 거리가 좀 있는, 그런데 그 "좀"이라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구조 안에서 쉽사리 분류하기 어렵고 나아가 같은 기표라 한들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하는, 그래서 판에 박힌 삶을 반복하면서 외려 삶을 해체하는 퀴어의 세속성에 그는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니네랑 똑같아'와 '우리는 니네랑 달라'의 회색지대를 양분으로 삼고자 한달까? 그런 점에서 본문의 어떤 논지들은 최근의 비판 이론을 퀴어 이론에 성실히 대입한 결과처럼 보이는데, 물론 그게 본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문학이라는 영토 안에서 이를 열심히 '핥아보려' 한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22.


대머리(민두라고 쓰긴 뭐하다...)는 언제부터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신화적인 스타일-기호가 되었을까? 장발의 신화는 조금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그 자리를 대머리가 채우고 있는 흐름의 세부가 궁금하다. 이 세부를 파헤치다보면 이 시대에 신화로서의 '예술가'가 무엇이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가령, 점점 더 '셀렙'에 가까워지는 예술가들은 이것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간단 말이지. 좀 억울하다. 



19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주의가 점점 더 판을 치는 것 같다. 가족도 가부장제도 국가도 민족도 주체도 젠더도 인간도 그냥 부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뇌수가 흘러내리는 것 마냥 어지럽다. 그러한 개념들이 아무리 공공의 적이라고 해도 수 많은 레이어가 역사의 두께와 개인의 사정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심지어는 모순적으로까지 엮인 비대한 구조인데, 이를 그저 하나의 레이어, 곧 환상으로 생각하여 자유(라는 이름의 환상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다니! 예를 들어, 다들 '공동체란 실은 실체 없는 허상'이라고 말하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을 들먹이긴 하나, 정작 그가 정말로 마주한 난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를 읽지 않고 요약문들만 열심히 탐독한 게 아닐까?)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암암리에 강조하는 진짜 주제는 이것이다; 만약 민족이 정말 '상상의 공동체'이기만 하다면, 어째서 수백년 간 수 많은 이들이 민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걸었단 말인가? 우리는 죽음도 불사한 그들을, 그 실재를 단순히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거부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이 푸코의 '담론'과 교묘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틀을 만들어내는 규범으로서의 개념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실재성을 지녔는지 자문해야 한다. 


923.


김영민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를 둘러싼 말들에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조잡한 논리를 비장하게 내세울 수 있지? 그래, 나 역시 이 칼럼이 기득권 남성 지식인이라는 필자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좀 진부해지고 나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근거로 이런 류의 '유희적 거부' 자체를 비난하는 건 결국 '모든 저항은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참여여야 한다'는, 가장 무시무시한 엘리트 계몽주의로 달려나가는 게 아닌가? 이러한 반응을 대표하는 게 바로 채효정의 페이스북 글이다. "이토록 '인간'에 있어 진중하고 근원적인 형식을 이따위로 가볍게 쓰다니! 이건 조롱이고 냉소고 죄악이야!"라고 쓴다한들 요약이 안 되진 않을 이 형편없는 생각이 좋아요를 천번 넘게 받았다는 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실없이 웃게 하는 말이 그 웃음으로 인해 '고무'라고 불리는 나름의 실천성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신문 칼럼란은 개인 SNS나 에세이와는 다르다고? 사실상 내용이랄 게 없다고? 이 칼럼이 오히려 그것을 노렸다는 걸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도 정녕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진지함을 미끄러트리는 우둔한 농담을 스스로에게도 던짐으로서 축적된 글 전체를 뒤흔들어 글을 둘러싼 담론(칼럼이라는 지면, 현실에 우회적으로 개입하는 '글')을 환기하는 것이 이 칼럼의 본의이지 않은가. 장정일조차 이 정도로 칼럼이라는 지면-평면을 유희적으로 뒤흔든 적은 없다. 내가 이 칼럼을 옹호하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런 류의 '실없는' 글은 좀 더 많이 쓰일 필요가 있다.


08.


여기저기서 올해 창비 신인소설상 당선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을 열심히 상찬하는 걸 보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박근혜 이후'에 넘쳐흐르던 자조인 "현실이 픽션 이상으로 픽션" 내지는 "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온다"가 작가들을 실제로 긴장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의 문학적 유행을 풍자로 움직였다는 것은 자명해보인다. 물론 이 때의 풍자는 이전의 풍자와 같지 않다. 지나치게 기괴한 현실을 거의 고스란히 극화함으로서 그 결과물을 '하이퍼 리얼리즘'과 '슈르 리얼리즘' 사이에서 진동시키려는 -혹자는 이를 "환장문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역설이 이 작품의 전략으로서의 풍자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류진은 현실의 기괴함을 놓치고 매마른 풍자에 그치는 여타의 구시대적 풍자극들보다야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으리라. 허나 나는 이 작품이 지나치게 동시대적인 게 아닌가 우려된다. 동시대적이라 우려된다니? 그 감성의 나름대로의 유효함과는 별개로, 당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걸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 결국 그러한 감성들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려)는 작품에 그치고 마리란 얘기다. 좀 더 짓궂게 말하자면, 내게 이 작품은 '썰'의 '기성문학적' 형태로까지 보인다. 나는 카프카의 다짐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를 아직 잊지 않았다.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문학 작품'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문득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난다). 그런데 창비 소설부문 심사위원들은 '소확행' 따위의 말을 언급하며 이 작품에 상을 줬다. 말이 되는 일이야 대체 이게?


944.


영화나 게임 비평같은 건 남들이 알아서 열심히 번역하(려고 하)니까 만화 비평을 번역해볼까 하는 생각을 말 그대로 생각만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국내에서 만화 비평을 하겠다던 시도들은 무엇보다 담론 소개에 있어 큰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가령, 앙굴렘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아쏘시아시옹은? 하물며 <피너츠>나 <땡땡의 모험>이나 <캘빈과 홉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한국어로 읽은 적이 있었나? 일본 시장이 번역에 열을 내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이 척박한 지형에서 '우리들'만으로 바로 시작하려는 건 느린 자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어떤 비평적 태도가 결여되어있다는 것도 문제다. 한 플랫폼에서 (좀 거칠게 분류하자면) 누구는 미학적, 누구는 사회적, 누구는 장르적, 누구는 산업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전문 영역에 의한 분업은 분명 필요하다. 허나 '비평 플랫폼'이라면 분업중인 필진들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만화관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 어느 플랫폼에서도 우리가 '만화'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공통된 고민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지금 이 판이 어떤데 그런 걸 요구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편집진은 글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정말 거기서 만족하고 싶은가. 그럴 수 있는가...


4.


네이버의 '컷툰'과 <며느라기>의 수신지 같은 작가(들)의 '인스타툰'은 어떻게 다를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별 컷에 댓글을 달거나 SNS에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내는 만화의 변화된 속성은 무엇일까? 인쇄 만화들은 최소 단위인 칸을 아예 지우거나 대체하는 식으로 페이지라는 평면/단위를 자율적 -물론 여기서의 "자율적"이란 좀 엄격하게 쓰여야 한다- 으로 쓰고 확장하는 반면 웹툰들은 하나의 칸으로 스스로를 축소해 단순화하며 인쇄 만화에서라면 가능할 자율성을 억제하는 추세는 이상하게 보인다. 하나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다른 하나의 자율성을 잃는다는 대가를 치르는 것일까?


13.


집에서 제일 가까워 자주 찾던 동네 단골 만화방이 몇 개월 전에 문을 닫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 크나큰 실망감을 안고서 요즘은 조금 멀리 떨어진 만화방을 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엔 웬만한 만화방에선 결코 없을 만화들이 잔뜩 있어서 들릴 때마다 실망감을 자연스레 잊고 그저 기쁘게 놀라게 된다. <왕가의 문장>이나 <포의 일족>, <GOGO 몬스터>부터 <블랙홀>, <에식스 카운티> 그리고 테즈카 오사무의 여러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내가 보길 원하는 작품들을 보기 위해 굳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서 한참 멀리 떨어진 만화카페에 갈 필요 없이 여기까지 조금만 걸어와도 상관 없어진 게다. 그 덕에 테즈카 오사무에 대한 (한동안 잠잠하던) 열정이 그야말로 샘솟고 있다. 그 열정 속에서 떠오른 질문 하나. 어째서 테즈카 오사무의 주인공들은 티마고 아톰이고 블랙 잭이고 칠색 잉꼬고 베토벤이고 할 것 없이 누군가의 대리거나 누군가의 조합으로서, 즉 누구를 대신해서 살아가는 '순수하지 못한' 존재들일까?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두 세계 사이에서 고독한 방황을 지속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는 영화나 연극 등의 예술에 대한 (만화가로서의) 테즈카의 광기어린 집착과 공명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러한 테즈카의 특성을, 회화와 문학과 영화 사이에서 '진지한'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밀려난 만화의 위치를 어떻게든 재고하기위하여 만화가 그러한 '진지한' 예술들을 끌어들이고도 버틸 수 있는지 탐색하려는 영웅적 사고의 형상적 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진 가설도 안 되는 생각일 뿐이지만...


145.


최근 한국 TV 예능 중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유일하게 즐겨보고 있다. 한국 요식업 시장을 둘러싼 담론들을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은근히 폭로한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진진한데, 가령 대전 청년구단을 '솔루션'의 무대로 만들 때, 업자 개개인 혹은 업자들이 공유하는 의식 문제처럼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미시적 사안은 물론이고(여기서 멈춘다면 이 프로그램은 보수 프로파간다로 이용될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야기하고 전시 행정에만 주력하는 지방자치단체나 이걸 가능케 한 '청년 담론'처럼 간접적으로 다뤄지는 거시적 사안들을 표면 위에 은근히 노출시키며 문제의 복합성을 복합적으로 환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오쓰카 에이지가 지브리의 작품들에 대해 한 말을 빌리자면) '수용자의 윤리성'에 문제를 맡기는 것. 실제로 방영 직후에 청년구단 계획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촛불 혁명'을 겪어버린 우리에게 변화를 위한 선동이란 오직 이런 식으로만 가능한 게 아닐까? 


0-2.


이 메모들로 티스토리 업로드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 이후엔 https://brunch.co.kr/@jesaluemary047 를 통하여 글을 쓴다. 몇몇 글은 여기에 남겨둘 터이고 몇몇은 수정을 거친 후에 브런치로 옮길 것이나 대부분은 지울 것이다. 당신이 지금 확인할 수 있듯이!




  • 아랑조아 2018.10.07 08:40 ADDR 수정/삭제 답글

    옛날 아랑글을 못보게 된다니 아쉽디만..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여 헤헤

미끄러지는 원리: ooo의 만화에 관하여

MA 2018. 8. 5. 22:10


ooo의 만화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마치 <치는 만화>에서 예상을 배반하는 스트라이크를 성사시키는 볼링핀들처럼 인물이 처음에 지녔던 목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패하고, 발화되었던 말은 반복되면서 본래 취했던 의미를 상실하고 배반한다. 설명과 소통의 구체성이 부재하는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미끄러짐은 필연적인 사태일 것이다(그리고 언제나 그 미끄러짐이 실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것 뿐인가? ooo의 인물들은 단지 상황의 애매모호함에 의해서만 미끄러질 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모든 작업은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 ooo의 작업들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인물도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명탐정 고난>의 첫번째 컷에서 세 인물은 한 원 안에 모여있었는데, 마지막 컷에선 그 원은 온데간데 없고 넓고 각진 바닥만이 그들을 받치고 있다. <Ok go>에서 택시를 잡고 출발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첫번째 컷의 파란 하늘이 세번째 컷에선 노을로 바뀌어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작품에서 매 컷마다 배경을 이루는 색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있다. 산만하다 해도 좋을 정도의 구성. 그러니까, ooo의 인물들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 미끄러진다. 





현재 해당 글은 https://brunch.co.kr/@jesaluemary047/46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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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임박한 이른 여름 앞에서: 몇 가지 메모

대충사는 이야기 2018. 5. 5. 22:12

0.


얼마 전 내가 제작자로 참여한 한 영화가 칸 영화제 모 부문 본선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기쁜 일이고 놀랄만한 경사지만 환영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전자는 나와 함께 영화를 만든 팀원들의 개인적 사정에 대한 말이고, 후자는 이 영화의 질과 그에 대한 수용 방식, 더 나아가 '영화제 프리미엄'의 양태에 대한 말이다.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는 데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내가 적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후자이다. 물론 명색이 제작자라는 이가 할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으나, 작은 조기 가시가 목구멍 깊숙이에 걸려 한참 동안 켁켁거려도 빠지지 않는 듯한 답답함과 짜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국내의 '암청색' 영화에 대한 해외 영화계의 선호는 (어느 정도 영화계의 경계선에 발앞꿈치를 아슬아슬하게 대고 있는) 나로선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단편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세이프>도 그렇지만, 칸 영화제 혹은 해외 영화제가 상영작 선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홍상수를 제외한) 한국 독립영화에 부여(하는 걸 넘어 요구)하는 예술산업적 구실의 색이란 폐쇄적이고 암울하며 폭력과 범죄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만들어지는 '암청색'인 게다. 영화제들이 종종 섹스와 폭력이 과잉으로 점철된 영화들에 환장한다는 걸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리 나쁜 상황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 '암청색' 이외의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걸리는 걸 상상하는 게 너무도 어렵다는 걸 떠올린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해외 영화제는 물론이고 국내 상업영화든 독립 영화든 이런 '암청색'이 판치는 것을 보며 짜증이 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다. 이는 '암청색' 영화에 대한 감정인 동시에 '암청색' 영화의 범람을 가능케 한 구조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다. 개별 작품의 질 보다는 이러한 범주에 얼마나 어울리냐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에 '국가영화'라는 말은 새로운 말로 재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영화'란 더 이상 내부적으로 시간을 들여 형성되어 후천적으로 명명되는 작품군이 아닌, 필름마켓을 오가는 세일즈 에이전트들의 (미리 정해져있는) '혜안'에 의해 선별될 것을 염두에 두어 내외적으로 형성되는 작품군이 되었으며 -물론 이 분류가 얼마나 거칠며 오류가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 이 영화는 작금의 영화제 시스템에선 이러한 예술산업적 구실로서의 '국가영화' 바깥에 대한 호응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해버렸다. 


16.


다음은 올해 들어서 읽기 시작한 것 중 지금까지 완독한 책들이다. 각각 [죽음의 엘레지], [너무 움직이지 마라], [을의 민주주의], [금과 화폐의 역사], [원시적 열정],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 사상사], [통일성과 파편성: 프루스트와 문학 장르], [벌거벗은 해], [미술관이라는 환상], [건담과 일본], [헤겔 또는 스피노자], [13인당 이야기](아마도 분량 대비로 가장 빨리 읽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프랑스인], [현대미술 글쓰기], [돈가스의 탄생]으로, 이 중 진태원 선생의 [을의 민주주의]는 가장 별로였다. 혹은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 초우의 [The Age of the World Target]을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아주 좋다. 비서구와 서구의 지적 권력 차이에 대한 (지금껏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16.1.


[을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떠올리면서 종종 하게되는 불평으로 가지가 뻗쳐나가다. 한국의 지적 풍토는 기초를 다루는 데서도 이렇게 부족한 지점이 생기는 걸? 한국에서 나오는 이론 서적들을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점점 더 요즘 더욱 생생히 느끼는데, 물론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며 번역의 유구한 욕망과 역사 운운하는 것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깊이 파고들려는' 태도 대신 표면에 있는 징후들을 잇질문을 제기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한국에도 독자성을 보인 이론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n차 연구에 적힌 서술을 흡수 및 적용하는 것 이상의 수준까지 나아가진 못하며 -예컨대 나는 홍범기가 이런 부류로서 거품 낀 지식인이라 본다- , 아주 소수의 인상적인 연구 역시 소수적-'급진적'인 독해를 표방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전제를 견지해 그것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의 'Radical'한 독자성을 보이는 이는 완전히 드물다. 예컨대 올해가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임에도 불구, 국내 영화이론계는 이에 완전히 무지했으며 관련 컨퍼런스가 열릴 기미도 전혀 없다. 


53.


친구와 한참 시시껄렁한 카톡을 주고받다 허문영이 FILO에 실린 <더 포스트> 비평의 첫 장에서 장인적 영화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는,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듣고야 말았고 거기에 절로 짜증이 솟구쳐 트위터에 이에 관해 조금 썼으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분이 죽지 않아 다시 쓰려 한다. 물론 허문영이 말하는 장인적 영화 자체가 작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당연히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는 할리우드의 '장인'들이 아니고서야 만들 수 없는 영화이다- 또 장인 없이 '예술가'들만 가득한 판을 상상하는 건 (당대의 그 어떤 '대중예술'에 있어서든) 불가능하지만, 집단적으로 장인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배분하고 그 안에서 장르영화의 범주를 다양하게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던 창조적 스튜디오 시스템이랄 게 어느 국가의 촬영소에서든 애진작에 붕괴하고 안전/친절우선주의가 판을 채운 지 오래인 작금에 어느 개별적인 영화 혹은 작가를 두고 비평의 영역에서 '장인들의 조화로운 기예가 미덕이다'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시대에 이미 고전적인 '장인'이란 예술가와 동일한 위상의 작업 방식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장인을 장인이라고 하기 위해선 먼저 장인들을 위한 시스템의 기반이 필요하나, 작금엔 아주 소수만이, 그것도 스튜디오의 주선이 아닌 자발적 협업을 통해 그렇게 작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멜파소 프로덕션을 떠올려보자. 대체 멜파소 프로덕션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 헨리 범스테드같은 이를 사망 직전까지 영화 현장에 고용하고 대접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스트우드가 직접 작곡한 (효과적인 감정선의) 음악들을 영화에 삽입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스트우드가 영화의 배우겸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로서 영화를 둘러싼 모든 사안을 전두지휘할 수 있기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지 않은가? 투르뇌르나 월쉬나 나루세가 촬영소의 '일개'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던 시대, 스튜디오 자체가 하나의 개성이고 미학이던 시대, 그런 집단적 기예가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는 끝났고 이젠 전혀 '장인적'이지 못할 환경이 주어졌는데, 그 속에서도 굳이 장인성의 영화를 주장하는 비평가의 행위란 결과적으로 '정통성'의 이데올로기를 파생상품으로 십분 활용하는 시장의 논리("원조 할머니가 직접 만든 양념장~")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꼴에 다름 아니리란 말이다(물론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했듯 작가주의 역시 이런 측면에서 시장논리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지만).

 

11.16.


최근에 발매된 미고스나 카디 비의 신작들을 들으면서, 당대의 음악을 멜로디나 프로덕션의 구성을 통해 논하는 게 확실히 불가능해지고 있다 느낀다. 애초에 비평이 지금껏 '소리가 잘 짜였네요' 수준에 머문 게 잘못이지만. 특히 미고스는 힙합에 있어 이 흐름을 새롭게 선도하는 것 같다. 


3. 


최근 몇 주 사이에 본 최신 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김응수의 두 편의 세월호 에세이(<오, 사랑>, <초현실>)와 코고나다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콜럼버스>였다. 물론 친구들이 "드니 안 좋아하는 너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거다"고 한 <내면의 아름다운 태양>과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지에 오른것만 같은 홍상수의 새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는 몸이 안 좋아 아직 안 보았고, 드디어 만난 뒤몽의 짜릿한 교훈극 <마 루트> -이 영화는 정말 이렇게 불려야한다!-는 그래도 2016년의 영화니 제외했다 치더라도, 이 작품들의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은 결코 바래지 않는다. 김응수는 (한 번은 강요된, 다른 한 번은 필연적인) 미메시스의 부재, 혹은 김응수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곤궁함" 속에서 그 부재가 지시하는 현실의 부재를 필사적으로 건드리고 인식하려하는데, 그러면서 숭고함과 윤리성의 페티시즘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순진해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비워내고 서로 미끄러트리는 것에 집중하는 그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시 국내의 '이 방면'에선 김응수만한 이가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차라리 김응수가 이미지를 건드릴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비로소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 우리에게 던져진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예컨대 <오, 사랑>에서 작은 항구에 모여있는 수 많은 사물들이 격렬하게 떨리는 순간처럼. 한 편 코고나다의 <콜럼버스>는 건축물들과 우거진 초록의 '완벽한' 조형적 대칭을 타고 흐르는 인물들의 말과 제스쳐가 무척 감탄스러웠다. 빗겨나가는 말들의 앙상블, 곧 영화와 건축의 유사성.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 원래 존 조를 기대하고 본 영화였으나, 정작 내가 러닝타임 내내 홀린 상대는 헤일리 루 리차드슨이었다. 물론 이 말은 리차드슨의 캐릭터에 매혹되었다는 게 아니라, 캐릭터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리차드슨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종종 깜빡이듯 드러나는 순간에 매혹되었다는 말이다. <17살의 끝자락>에서 보여준 스타적 가능성보다 훨씬 나아간 그 미소는, 분명히 매우 귀중한 이미지다.


18.


여행-성장-재회의 플롯이란 (프랑코 모레티가 빅데이터 연구로 증명했듯) 근대 이후 완전히 낡아 이젠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범용해진 극작술이긴 하지만, 나에겐 극 속에서 재회가 정말 재회로 완수되는 순간이 그 범용함 이상으로 기분 나쁜 잉여로 다가온다. 차라리 무섭다고 할까, 정말 달라진 '나'가 다시 만난 '너'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역은 또 어떠한가라는 의문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재회의 완수가 가능한 플롯에서의 '너'란 '나'와는 다른 타자가 아닌, 기껏해야 '나'의 과거라는 지표에서 끌어올린 '윤리적 성찰'에의 객체에 불과할 터. 그렇게 된다면 '너'와의 '사랑'은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고 그 간극을 그냥 간극이라고, 범접불가능한 영역이라고 선언해버리는 것도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감상적으로 정체화해버리는 점에서 짜증나는 태도다. <카드캡터 사쿠라: 클리어 카드>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는 심리에는 이런 재회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요즘의 일본 만화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아무리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라도.


256.


어쩌다보니 새 어벤저스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주말마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 영화의 정치학(을 가장한 '정파학') 따위의 케케묵은 논리는 이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앞에서 완전히 무용한 것이 된 듯 보인다. 이제 사람들의 안구를 집중시키고 극장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물량의 감각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와칸다의 전투 시퀀스는 그 점에서 그냥 간단히 시대착오적/인종혐오적이라 말하기 꺼려진다. 대평원에서의 육탄전만 영화 속 전쟁의 모든 것으로 여겨지며 첨단 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철저히 배제되는 -<블랙 팬서>에서 보았던 포탑과 전투기는 어디에 있는가? 와칸다 정도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지켜온 국가에 이 정도의 전술법밖에 없단 말인가?- 상황을 두고 토르의 막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블랙 팬서>의 설정을 모두 배반했다는 지적도 타당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를 지난 어벤저스 영화들의 클라이막스 전투의 연장선상에서(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개인과 개인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육탄전을 세세히 다루는 것만큼 사람들을 자극시킬 충격은 없다는 게다. 특히 그것이 영웅들이 처한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어벤저스 1에서 아이언맨이 뉴욕에의 핵폭탄 투하를 처절하게 저지한 것도, 어벤저스 2에서 쉴드의 공중전함이 일찍 나타나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소코비아를 폭파하거나 EMP를 투하하는 대신 뒤늦게 나타나 구조선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도 같은 목적 때문이 아닐까? 내러티브 상 심리적인 '노동'은 점점 더 간소화되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은 점점 더 광폭해지는 상황. 어쩌면 이는 할리우드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대작들을 제작해 자본 사이에 일종의 '중재'를 야기하(려)던 것과 중첩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더. 어째서 뉴욕의 절멸은 막을 여지가 있었지만 소코비아와 와칸다의 절멸은 필연적인가? 왜 전쟁의 무대는 대륙으로, 우주로 확장되며 정작 미국 본토는 벗어나는가? 미국의 책임을 논하려 한다면서 정작 미국이 (신적 폭력이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 드는가? 


27.


게임 비평을 하고 싶지만 나는 게임을 잘 못한다. 게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각-경험 체계를 어떻게 비판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이전에 게임을 잘 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게임을 잘 플레이하지 못한다면 게임 비평은 커녕 다른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것조차 못할 테니까.

  • 팟저 2018.08.24 04:33 ADDR 수정/삭제 답글

    16.1 윤노빈이나 김영민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