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에 관한 짧은 생각

행진하는 영화 2015. 2. 26. 09:36


얼마 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을 뇌내재생하다가 이 영화가 끊임없이 극단의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옥같은 더위로 가득 찬 평민들의 땅과 에어컨이 있어 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향유할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성, 불이 꺼진 방과 불이 켜진 방, 딱딱하고 비싼 구닥다리 구두를 파는 늙은 부르주아와 싼 엉터리 구두를 팔려는 (상대적으로) 젊은 부르주아들, 아들을 잃었으나 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기사와 모든 걸 가졌으나 돈을 내지 않으면 한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임을 아는 갑부 곤도(이 둘은 서로 멀리 떨어진 반대편의 벽 만을 바라보며, 또 곤도가 기사에게 다가가면 기사는 그 자리를 피한다), 아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버리려 하는 기사와 돈을 위해 아이를 버리려 하는 비서(이 둘은 옷 색도 백과 흑으로 대비된다), 편히 앉아있다가 커튼을 열자 숨기 위해 바닥에 누워버리는 형사들, 끈질기게 한 공간 안에서만 전개되는 전반부와 끊임없이 공간을 바꿔나가며 진행되는 후반부, 선한 부르주아인 곤도와 악한 프롤레타리아인 범인, 결국 마지막까지도 극단의 상황에 대한 화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둘 사이의 간극만을 재확인하게 만들며 (초반부 갑부의 집의 '커튼'이 세로 방향으로 닫히는 것과는 상반되게) 가로 방향으로 내려가 둘 사이를 단절시켜버리는 '셔터'. 영화는 이렇게 두 이미지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결국 이 세상에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처럼. 물론 단 두 번, 갑부의 아들과 기사의 아들의 옷이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장면과 범인이 갑부와 마주하여 담뱃불을 빌리는 장면에서 구로사와는 이 두 계층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그 장면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버린다. 결국 한 아이는 사라지고, 한 남자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서로의 깊고 넓은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좁혀지지 않는 이 간극은 <거미의 성>이나 <란>의 절망 보다도 더 염세적이고 고통스럽다. 대체 구로사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구로사와의 가장 끔찍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