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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픽스: The Return에 대한 메모
<트윈 픽스>의 새로운 시즌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번지르르하나 가장 따분한 말은, 아마도 이 작품이 '둘로 나뉜 영화'의 일종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일 맥라클란이 데일 쿠퍼와 그 사악한 도플갱어와 더기 존스라는 1인 3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 엠파이어>의 방법론의 연장선상에서(만) <트윈 픽스: The Return>을 독해하려는 고착적인 시각들 말이다. 이것은 이 직전의 린치의 작업들의 선로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는 린치 스스로가 스스로의 세계를 통합, 결산지으려는 듯한 면모가 보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저 3편의 작품들이 배우의 육체라는 유일성의 기표에 서로 불화하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를 서사 구조(들) 안에서 은밀히 혼재시키는 방식의 역할 전이 - 이 말은 굉장히 주의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 를 통해 영화에 (유령들을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강령의 구멍을 뚫고 객석을 위협하는 미스터리를 형성하던 것과는 달리,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카일 맥라클란의 배역들에 강력한 캐릭터성을 부여해 구조적 난교의 상황을 회피 (혹은 지연?) 하고, (8화를 제외하면) 타임라인을 상대적으로 선형적으로 구성하는 등, 엄밀한 의미에서의 서사 해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의 선로는 어디인가? 특유의 편집과 특수 효과에선 구조주의 영화에 걸쳐있기도 하고 린치의 영화적 기원이라 할 만한 5~60년대 B급 호러 무비에 걸쳐있기도 하고 혹은 <인랜드 엠파이어>의 디지털 질료에 걸쳐있기도 하며, 지금까지의 린치가 맥거핀에 가까운 질문("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리타는 대체 누구인가?")을 제시하고 서사를 구동하던 것과는 달리 그런 질문 자체가 사라져있기도 하다. 허나 그렇다고 섣불리 <트윈 픽스: The Return>를 (극적 서사에 관심이 없는) 시청각적 실험의 영역으로 분류시켜선 안 된다. 린치라는 작자는 언제나 완전한 구상과 완전한 추상 사이의 불안전한 지대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그 형체를 거의 논리적으로 식별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며, 이는 군상 부조리극의 성격을 체현하고 있는 <트윈 픽스: The Return>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점은 나머지 에피소드를 본 뒤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만 <트윈 픽스: The Return> 라는 작품이, 더 나아가 데이빗 린치의 세계가 결정화되는 주요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구멍-함몰점-통로가 연결되는 이미지일 터인데, 첫 에피소드의 첫 시퀀스에서 <인랜드 엠파이어>의 엑손 라디오 광고처럼 소리의/에 기이한 강도를 '작동'시키는 축음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를 내뱉는 통로로서의 축음기 구멍은 큐브에 뚫린 구멍, 구토하는 입, 차 키 구멍, 콘센트, 천장의 공동, 하늘에 뚫린 구멍,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구멍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로스트 하이웨이>에 이르러 규범적인 '이름'을 해체하던 분열된 육체를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 자체로 흉포하게 찢겨져 폭력적인 감각을 생성 및 이동시키는 통로로서의 육체로 변이시킨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신체'의 해체라는 린치의 오랜 주제의 한 결산인걸까. 혹은 <트윈 픽스: The Return>과 그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동시대의 작가로는 -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에 등장하는 하얀 연기들은 어딘가 아핏차퐁의 그것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 영화 안에서보단 영화 바깥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내가 여기서 떠올리는 이름은 바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데이빗 린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모방하고 있다. 상호연관적으로 구성되는 실제와 환상의 불분명한 도식과 그 도식의 불분명함을 가능케하는 특수한 공간의 유사함이 그러하며, 2~3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공간들, 특히 3화 첫 시퀀스의 공간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208호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부터의 하루키가 천착하는 (유사)형제 혹은 부모자식간의 관계라는 모티프가 도처에서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더기 가족의 변화에서 가장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부정의 대상인 아버지로서의 더기, 이를 대체하며 그 낮은 지능(의 수동성)에 의해 오히려 주변 세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치유하는 (더기-쿠퍼의 외면적인 이질성을 주변 인물들이 서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걸 이 지점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더기-쿠퍼, 그리고 '깨어난' 뒤에 그 세계와의 작별을 선언하는 쿠퍼. 이는 같은 16화에서 다뤄지는, 리차드 혼에 대한 사악한 쿠퍼(Evil Cooper)의 끔찍한 아버지상과 강하게 대비된다. 혹은 사악한 쿠퍼는 "I don't need it, Ray. I want it."이라고 말하며 '필요'라는 자기결핍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한 편, 쿠퍼는 마이크와의 대화에서 "I need to make another one"이라고 말하며 자기결핍의 언어를 긍정한다. 아마 정신분석학 비평가들은 이 지점에 천착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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