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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09 <그 후>, 아름 혹은 유머
- 2017.09.01 트윈 픽스: The Return에 대한 메모 1
- 2017.08.29 여기에도 비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4
- 2017.08.06 '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
- 2017.03.19 나는 너를 보지 않는다 - <해피 아워>
- 2016.06.30 <캐롤>에 대한 메모
- 2015.03.22 직관과 경험에 대하여
- 2015.02.26 <천국과 지옥>에 관한 짧은 생각
글
<그 후>, 아름 혹은 유머
* 이것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초고이다. 글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기에, 이 글을 백업한다.
결국 유머란 견고하게 세워진 픽션과 픽션들 사이를 관통해 구멍을 뚫는 화살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픽션이란 무엇인가.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만이 픽션이 아니다. 인위적인 '가상'의 논리가 곧 픽션이다. 그렇다면 구멍이 뚫린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것은 곧 픽션이 픽션으로서 실패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픽션이 그 구성의 기반으로 삼은 '사실'의 논리가 사실 '사실'이 아님을 폭로하는 순간이기에, 훌륭한 유머란 (표적으로서의 픽션에 대한 '공격'의 정확도를 위해) 심각함과 태연함을 겉에 두른 채 픽션들이 선 고정된 지각을 흐트러뜨려 개중 무능한 픽션을 폐기하고 '사실'적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훌륭한 픽션을 유지 및 각성시키는 힘을 지닌 것일 터이다. 앞서 "훌륭한"이란 형용사가 각각 "유머"와 "픽션" 앞에 붙은 채 반복되었는데, 이 반복은 유머 역시 결국 어떤 인위적 논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즉 유머의 토대를 환기하기 위함이다. 유머가 유머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 한 유머란 성공적인 유머일 수는 없다.
유머란 예컨대 농담처럼 단발적으로 웃음을 유발하고선 명멸하는 이미지, 혹은 웃긴 것 뿐만이 아니라 태도, 방법론, 혹은 더 나아가 이념 역시 포함하는 것으로, 이 태도의 가장 명시적인 예로 우리들 중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 중 하나인 홍상수의 근작 <그 후>를 떠올리는 게 좋을 터인데, 극 중 김민희가 분한 아름은 봉완(권해효)의 "그럼 아름이는 뭘 믿어?"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거.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것이 사실은 다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것. 이 세상을 믿어요" 여기서 두 번째와 세번째 사이에 "그렇기에"라는 연결사가 괄호쳐진 채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앞의 두 믿음이 일종의 조건으로서 충족되어야만, 세계를 긍정하는 세번째 믿음은 가능해질 수 있다.
개인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혹은 '살아있음'이란 상태에 어떻게든 집착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제아무리 초월을 추구한들 결국 '세계'의 절대적 영향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계의 존속과 재생산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세계'가 진행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완전무결하게 확정된 주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불가능성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주체이고 "스스로가 선 지각의 상태를 직시"라는 태도, 곧 유머이다. 아도르노의 말, "즉 어떤 한계를 설정하게 되면 그러한 설정을 통해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봉완이 되새긴 "내 인생은 포기하자"라는 주문 역시 불가능성의 직시라는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유머러스하다 오해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의 딸의 ‘아버지’라는 한계 설정은 (봉완 스스로 인정하듯) 자기파괴를 향하고 있지 아름의 경우처럼 자기해방을 향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사태의 책임을 모호한 언어로 비켜가려 하는, 경멸스러운 자아방어기제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름이 내뱉는, 불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언어는 봉완을 필두로 한, 상황의 표면에 대한 자신의 (증명되지 않은, 혹은 원하는) 주관을 앞세우며 비틀린 시간 속에서 '나가지 않는' 고착을 선택한 극 중 인물들과는 아름이 전혀 다른 성질의 형상임을 예고한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이라고 해야하는 건, 본작에 등장하는 유리문들, 특히나 때에 따라 투명도를 달리 하며 때로는 심연의 색을 입는 출판사 사무실의 그것이 거의 입(入)만을 허용하는 경계로서 작동했으며 오직 아름만이 출입구로서의 유리문들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멍을 뚫고 그 사이를 유유히 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지극히 반골적인 작가라면 이는 그가 소위 지식인 남성들의 찌질함을 폭로함으로서 남성 중심적 세계를 저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앞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 인물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프레임과 씬의 배열을 통해 은연중에 ‘닫힘’을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고정적인 가치(언어, 시간, 현실, 표면 등)를 거부하며 그 영토들에서 탈출하거나 대안을 갈구하는 방식으로 위계를 생산하는 관념적 토대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홍상수의 세계에서도 <그 후>에서 만큼 자유에의 추구가 격렬한 파열음을 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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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픽스: The Return에 대한 메모
<트윈 픽스>의 새로운 시즌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번지르르하나 가장 따분한 말은, 아마도 이 작품이 '둘로 나뉜 영화'의 일종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니까 카일 맥라클란이 데일 쿠퍼와 그 사악한 도플갱어와 더기 존스라는 1인 3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 엠파이어>의 방법론의 연장선상에서(만) <트윈 픽스: The Return>을 독해하려는 고착적인 시각들 말이다. 이것은 이 직전의 린치의 작업들의 선로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는 린치 스스로가 스스로의 세계를 통합, 결산지으려는 듯한 면모가 보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저 3편의 작품들이 배우의 육체라는 유일성의 기표에 서로 불화하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를 서사 구조(들) 안에서 은밀히 혼재시키는 방식의 역할 전이 - 이 말은 굉장히 주의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 를 통해 영화에 (유령들을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강령의 구멍을 뚫고 객석을 위협하는 미스터리를 형성하던 것과는 달리,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카일 맥라클란의 배역들에 강력한 캐릭터성을 부여해 구조적 난교의 상황을 회피 (혹은 지연?) 하고, (8화를 제외하면) 타임라인을 상대적으로 선형적으로 구성하는 등, 엄밀한 의미에서의 서사 해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의 선로는 어디인가? 특유의 편집과 특수 효과에선 구조주의 영화에 걸쳐있기도 하고 린치의 영화적 기원이라 할 만한 5~60년대 B급 호러 무비에 걸쳐있기도 하고 혹은 <인랜드 엠파이어>의 디지털 질료에 걸쳐있기도 하며, 지금까지의 린치가 맥거핀에 가까운 질문("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리타는 대체 누구인가?")을 제시하고 서사를 구동하던 것과는 달리 그런 질문 자체가 사라져있기도 하다. 허나 그렇다고 섣불리 <트윈 픽스: The Return>를 (극적 서사에 관심이 없는) 시청각적 실험의 영역으로 분류시켜선 안 된다. 린치라는 작자는 언제나 완전한 구상과 완전한 추상 사이의 불안전한 지대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그 형체를 거의 논리적으로 식별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며, 이는 군상 부조리극의 성격을 체현하고 있는 <트윈 픽스: The Return>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점은 나머지 에피소드를 본 뒤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만 <트윈 픽스: The Return> 라는 작품이, 더 나아가 데이빗 린치의 세계가 결정화되는 주요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구멍-함몰점-통로가 연결되는 이미지일 터인데, 첫 에피소드의 첫 시퀀스에서 <인랜드 엠파이어>의 엑손 라디오 광고처럼 소리의/에 기이한 강도를 '작동'시키는 축음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를 내뱉는 통로로서의 축음기 구멍은 큐브에 뚫린 구멍, 구토하는 입, 차 키 구멍, 콘센트, 천장의 공동, 하늘에 뚫린 구멍,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구멍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로스트 하이웨이>에 이르러 규범적인 '이름'을 해체하던 분열된 육체를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 자체로 흉포하게 찢겨져 폭력적인 감각을 생성 및 이동시키는 통로로서의 육체로 변이시킨다. 그렇다면 <트윈 픽스: The Return>은 '신체'의 해체라는 린치의 오랜 주제의 한 결산인걸까. 혹은 <트윈 픽스: The Return>과 그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동시대의 작가로는 - 물론 <트윈 픽스: The Return>에 등장하는 하얀 연기들은 어딘가 아핏차퐁의 그것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 영화 안에서보단 영화 바깥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내가 여기서 떠올리는 이름은 바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데이빗 린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모방하고 있다. 상호연관적으로 구성되는 실제와 환상의 불분명한 도식과 그 도식의 불분명함을 가능케하는 특수한 공간의 유사함이 그러하며, 2~3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공간들, 특히 3화 첫 시퀀스의 공간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208호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태엽감는 새 연대기>부터의 하루키가 천착하는 (유사)형제 혹은 부모자식간의 관계라는 모티프가 도처에서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더기 가족의 변화에서 가장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부정의 대상인 아버지로서의 더기, 이를 대체하며 그 낮은 지능(의 수동성)에 의해 오히려 주변 세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치유하는 (더기-쿠퍼의 외면적인 이질성을 주변 인물들이 서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걸 이 지점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더기-쿠퍼, 그리고 '깨어난' 뒤에 그 세계와의 작별을 선언하는 쿠퍼. 이는 같은 16화에서 다뤄지는, 리차드 혼에 대한 사악한 쿠퍼(Evil Cooper)의 끔찍한 아버지상과 강하게 대비된다. 혹은 사악한 쿠퍼는 "I don't need it, Ray. I want it."이라고 말하며 '필요'라는 자기결핍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한 편, 쿠퍼는 마이크와의 대화에서 "I need to make another one"이라고 말하며 자기결핍의 언어를 긍정한다. 아마 정신분석학 비평가들은 이 지점에 천착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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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비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물론 단 한 번도 영화 비평지였던 적이 없으며, 그나마도 신전영객잔의 은밀하고도 갑작스러운 폐지 이후로는 명목상으로라도 내걸었던 비평이란 두 글자를 잡지 뒷면에 쑤셔넣어버린 씨네21이지만, 최근 이 잡지가 비평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가 이 잡지가 영화계에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른다. 이미 우리는 씨네21이 비평이란 이름에 걸맞는 행보를 어떻게 보여왔는지 알고 있다. 씨네21이 2016년 영화 결산에서 박찬욱의 졸작 <아가씨>를 1위에,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6위에 꼽은 것은 물론 굳이 여기서 길게 논할 필요도 없는 넌센스적 사태이지만,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침묵은 넌센스라고도 할 수 없는 치졸한 태도였다. 그 때 홍상수는 김민희와의 불륜 스캔들로 인해 공공의 질타의 대상이 되어있었고, 그런 와중에 개봉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아주 적은 수의 관객들과만 만날 수 있었다. 그래, 혹 씨네21 소속의 평자들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좋지 않게 봤을 수는 있고, 그래서 박하게 지면을 할애했을 수도 있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그렇다. 하지만 스캔들로 인한 힐난들로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옹호하지 않은 것은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평소 홍상수의 영화에 덮어놓고 예찬을 늘어놓던 - 개중 실속있는 예찬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논외이다 - 씨네21이 이에 대한 그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던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냔 말이다.
이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도 통용되는 논리다. 여러번에 걸쳐 <불한당>에 관한 기사를 실었던 씨네21이지만, 그의 정치적 성향과 시니컬한 ‘드립’을 가감없이 기록한 개인 트위터로 인해 소위 '깨시민'들로부터 불합리한 사이버불링을 당했으며 –나는 학교 사람을 포함, 오프라인에서 그를 '정신병자'라며 욕하던 이들을 몇몇 본 적이 있다- 그런 불합리한 이유로 스스로의 영화가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던 <불한당>의 감독 변성현을 위한 변호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단 한 줄의 지면조차 할애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사한 사태가 유사하게 -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 반복되었다면, 씨네21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둘러싼 스캔들에 개입하길 피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대중의 거친 분노 앞에서는 "영화는 영화다"라는, 아주 간편한 회피의 제스쳐조차 그들에게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물론 이 제스쳐는 나중에 송경원 평론가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대해 쓴 글에서, 마치 자신은 이 사태에 대해 당당하다는 듯 취하긴 했으나, 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함에 있어서조차 지나친 지각에 지나친 당당함이 깔려있다는 점에서 실은 수치스러워야 할 제스쳐이다) 하지만 반향이 두렵다고 해서 그 분노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판에 미세한 진동조차 일으키기 전부터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비평지'로서의 책임방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서의 씨네21의 비평적 침묵이란 자신들의 무능력과 안일함에 기인했던 지금까지의 비평적 침묵과는 달리, 외적 요인으로 불합리한 비난을 받는 영화와 영화인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는 대신 옹호와 더불어 딸려올 비난들로부터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펜을 내려놓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비평적 침묵이다.
이런 비평적 침묵이 보다 비겁해지는 맥락이 있다. 바로 씨네 21의 1119호로, 바로 <군함도> 논란에 대한 코멘트가 실상 핵심인 호이다. 타이틀인 "지금, 영화 평론의 유의미함을 묻다"에서부터 '대체 당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따져묻고 싶어지나 이를 참고 장을 넘겨보면 에디토리얼의 제목 "결국 영화를 지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 내용까지 읽은 뒤에는 도저히 참기 힘든 분노가 울렁거린다. '#영화계_내_성폭력' 관련 대담을 몇 회에 걸쳐 특집으로 다뤄온 편집장이 "스탭의 별것 아닌 SNS 불평도 ‘모 영화현장의 불합리한 처우’로 둔갑해버리는 세상이다"라고 단언해버리는 것도 끔찍하지만 (설사 그렇다고해도, 한국의 영화 제작 현장이 얼마나 열약하고 폭력적인 지 알고 있다면 저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군함도>의 역사관과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비판들을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자유롭게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기도 전에, 어떤 ‘선동’의 조짐이 있었다고 느꼈다"거나 (심지어 이것은 '그' 박찬욱의 말이다!) "어떤 영화의 역사적 허구는 동조되는 반면, 왜 또 다른 영화의 역사적 허구는 동조되지 않는 것일까"라고 칭하며 이를 "몰상식한 여론몰이"로 축약하는 반지성적 태도는 더더욱 끔찍하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일도 그렇고 그 패배의 기억이 창작자의 의욕을 갉아먹는 일일 것이다"라며 "영화로 저항"하는(!) 류승완에게 깊은 연민을 보내는 마지막 단락은 또 어떤가. 아니, 주성철 편집장 본인이 나서서 이렇게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영화를 지"키려는 자신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군함도>가 어째서 질타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군함도>의 역사 각색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부정으로 향했는지, 또 <군함도>와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어떻게 완곡히 분리할 수 없는 성질을 띠고 있는지 모두가 말하고 있으나, 마치 씨네21만 이를 모른다는 듯 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선 <군함도>를 그런 시각들로 지키기 위해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포함한 특집까지 싣고 1 그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군함도>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김영진의 비평 에세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운동과 활력’이다. 나는 여기서 김영진이 얼마나 영화를 재밌게 봤는지를 비판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나, 겨우 이 정도의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론까지 어떻게든 끌어오는 데서 폭발하는 김영진의 빗나간 오기에는 관심이 있다. 대체 어트랙션 몽타주의 피상적인 지점만 끌어와 -자크 랑시에르가 지적했듯,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의 힘은 그로테스티컬하고도 에로틱한 충돌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영화의 모든 맥락을 억지로 제거하고 그 레토릭만으로 <군함도>의 몹 씬을 상찬하는 것에 어떤 '비평적 태도'가 스며들어 있단 말이며, 영화의 남성중심적이며 전시적인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비판(“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보고 싶었던 조선 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하는 박유하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정작 이에 대한 반박이나 논증의 과정 없이 “이 영화의 활기가 맘에 든다”고 일순에 어처구니없이 결론을 내버리는, 주장으로도 성립하지 못하는 감상에서 어떤 '비평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김영진은 여기서 찬성을 위한 찬성만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군함도>에 대한 상기한 비판들은 그 자체로 반박할 만한 근거가 내겐 없다. 다른 각도에서 얘기를 풀어가고 싶다.”는 문장은 그로 하여금 반박하기 힘든 주장을 비켜가고 민중 프로파간다로서의 정당성이라는 주장으로만 직진해, 전적으로 영화 안에서만 영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어설픈) 논리를 은근히 세우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를 두고 20세기 대중영화에 대한 비평 프레임을 자동적으로 끼워맞추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이드리언 마틴 이후에 비평의 영역에서 그 시대의 도식성과 현재의 도식성을 온전히 비교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김영진은 <군함도>가 군함도라는 역사적 이미지 자체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범용한 ‘천함’에 함몰되었다는 것을 기어이 부정하려는 듯, 아니 아예 눈을 감으려는 듯 보인다. 사실 이것은 김영진만의 문제가 아닌, 주성철 편집장을 비롯하여 이 수준의 비평을 별다른 코멘트 없이 기어이 싣고 만 씨네21 편집진의 문제일 것이다. 씨네21이 '비평지'로서 한 영화를 위해 이 정도의 적극적인 옹호의 스탠스를 위한 것은 아마 <비밀은 없다> 이후 처음일 것이다.
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불한당>의 사례와 <군함도>의 사례를 가르는 명확한 옹호의 잣대를 파악할 수 없다. 이 세 영화 모두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았으며 어느 영화를 옹호하든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하나, 앞의 두 영화는 영화 외적인 스캔들과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한, 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폭력적인 거부였고 (그런 점에서 <군함도>에 대한 박찬욱의 코멘트는 이 사례에 더 어울린다) <군함도>의 경우는 이미 영화를 본 대중 사이에서 반대 여론이 형성되어 진행된, 영화 내적 문제에 대한 거부였으며 또한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보다 이성적인 거부였는지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씨네21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과 <불한당>에 침묵하고 <군함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길 선택했다. 씨네21의 '비평'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여러 측면에서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나로서는 어째서 씨네21이 <군함도>만을 이리도 전투적으로 옹호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단지 류승완과 그의 인맥이 한국 영화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엄청나며 그 가지가 씨네21에도 뻗쳐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허나 나에게도 분명히 보이는 것은, 씨네21이 비평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 침묵과 옹호가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단 한 번도 비평지였던 적이 없으며 그나마 '비평'을 내걸던 글들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한참 되었으나, 이젠 그 존재의 가치조차 의문스러운 이 씨네21이란 잡지에도 굳이 비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런 비평은 그 천박함과 비겁함 때문에 우리가 가장 지양해야 할 모델로서의 비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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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씨네21이 <군함도>를 '지키지' 않으며 <군함도> 논란에 제대로 임하고자 했다면 <군함도>에 부정적인 의사를 지닌 이들 역시 인터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이들은 류승완 본인과 그의 지인들 아니던가? 심지어 박찬욱과 봉준호는 류승완의 '진심' 같은 우스꽝스러운 언사를 내뱉고있다. 천박한 알탕의 장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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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국내에선 '응답하라' 시리즈가, 해외에선 <기묘한 이야기>가 그러했듯 근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상 매체들이 도착적으로 보일 정도로 해당 시대의 문화적 요소들을 과시적으로 배치했을 때도, <시그널>이 2.35:1 비율의 영상을 16:9로 스트레치해 아날로그 시대('를 다룬'이 아닌)'의' 영상을 구현했을 때도, <라 라 랜드>가 최후반부의 회상에 디지털 카메라도 아닌 8mm 필름의 화면을 사용했을 때도, '구닥 캠(Gudak Cam)'이라는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이 필름 카메라의 영롱한 색감을 모방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3일 뒤에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의 번거로움마저 모방했을 때도 이 질문을 명확하게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전 시대의 복고와는 다른, 괴상한 복고의 징후가 소위 '포스트 미디엄 시대'의 여기저기서 엔트로피처럼 번지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카드캡터 사쿠라>와 <프리크리>의 시퀄이 공개된다고 했을 때, <교향시편 에우레카 세븐>의 본편 10년 전 사건인 '퍼스트 섬머 오브 러브'를 다룬 프리퀄이 극장판 삼부작으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봉신연의>가 애니메이션 20주년을 맞아 리메이크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은하영웅전설>이 여명편부터 새롭게 애니화한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 유아사 마사아키가 넷플릭스에서 데빌맨 리메이크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이 아니메들이 2018년에 제작 혹은 공개된다고 했을 때 나는 이 혼란스럽게 펼쳐진 성좌들이 그리는 과거의 형상 앞에 멍하니 서서 이렇게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 질문을 재패니메이션에 한정시켜 진행하고 싶다.
이 현상은 분명 어떤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향수라는 욕망이 문화에 투영되던 양식으로서의 복고에 그치지 않고서 말이다. 허나 여기서의 변화란 '진보'가 아니라 '진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철저하게 반 진보적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어디론가 회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 "어디론가". 정확한 좌표의 서술이 부재하는 단어. 선술한 애니메이션들의 명단의 나열만 보더라도, 이 예기치않은 리부트 현상이 특정 세대가 기성 사회에 안정적으로 편입한 결과 때문이라고는 쉬이 말할 수 없다. 간단하게 제작 연도를 비교해보자. <데빌맨> 시리즈가 마지막으로 영상화된 것은 요조시레누편 OVA가 발매된 1990년이었다.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판의 마지막 외전 OVA와 <카드캡터 사쿠라> TVA가 제작된 것은 1999년이었으며, <교향시편 에우레카 세븐>은 2005년에 공개된 작품이다.
여기엔 약 15년이라는 간극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최소 15년의 간극이 있다. 구체적인 공통분모 없이 '과거'란 이름으로만 묶이는 이 간극. 헌데 이 간극을 무시하고 이 현상에 대해 말을 얹는 것이 가능할까? 이 현상은 '토토가'가 아니다. 특정 세대에 호소하기 위한 기획이라고 말하기엔 그 타겟으로서의 '특정 세대'가 정확히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상을 무한히 넓힌 타겟팅을 취해 명작의 귀환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에 다시 불러오고있다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고로 여기서 아날로그 따위의 말을 얹는 것은 그야말로 무용하며 더 나아가 무지하다) 당장은 무작정, 혹은 무차별적으로 "어디론가" 회귀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복고나 향수가 아니라, 말 그대로 회귀다. 물론 '토토가' 역시 90년대 TV 영상 문화 뿐만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 조건들 - 4:3 비율 화면, 투박한 CG와 타이포그래피 - 까지 재현하긴 했으나 그 재현이란 것을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수행하며 이런 기획의 지속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재빨리 현재로 돌아가(려)던 것과는 달리, 리부트되는 최근 애니메이션들의 재현은 거시적으로는 n기를 제작하며 지속 가능한 기획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미시적으로는 과거의 서사에 대한 재현 자체를 자신의 근거로 삼고 더 나아가 존재 양식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본편의 타임라인을 기준으로 그 전 혹은 그 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과거를 향해 뚫린 구멍 자체가 이 시대에 '새로운' 문화 모델의 통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4~5년에 공개된 바 있는 <디지몬 어드벤쳐 tri.>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크리스탈> 1, 2기의 상대적인 흥행 실패와 저평가는 사실 이상한 사태가 아니라 당연한 흐름이라 봐야한다. 두 작품을 둘러싼 시청자들의 불평이 주로 원작의 작화와 캐릭터 묘사와의 불화에 집중된 것은, '오타쿠'들이 세계관 설정과 '귀여운'(可愛い) 작화에 집착하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과잉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원작의 그림체를 따와 저 리부트들의 그림체를 '수정'하기도 했다. 원작의 디테일의 재현에 대한 집착. 달리 말하자면, 과거의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부정의 시도가 역으로 부정당한 것이다. 차라리 이 현상을 작동시키는 핵심은 과거를 긍정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과거밖에 없다는 주문이다. 아무래도 이 주문은 제작자와 수용자 양측 모두에게 내파된 듯 하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새로운 '매체'(로 오인받는) 넷플릭스 역시 <데빌맨>으로 이 판세에 뛰어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2020년에는 테즈카 오사무의 원작 <지상 최대의 로봇>을 우라사와 나오키가 재구성한 <PLUTO>가 8부작 애니메이션화된다. 점점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리부트되고, 그 대상은 점점 더 과거를 향하려하며, 새로운 매체들은 이를 '새로운' 양식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 회귀는 어딘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애니메이션, 혹은 더 나아가 영상 매체들의 발악인가?
잠깐, 당연하지만 이 글은 이 현상을 부정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독해했다면 당신은 나의 논점으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 현상 자체가 어떤 묵시록적인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정성일의 <아바타> 비평을 생각하며 말하는 중이다) 허나 무턱대고 긍정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다만 나의 우려는 갈수록 이런 애니메이션들이 늘어나, 징조에 그치지 않고 회귀라는 현상을 이룬다는 데에 있다. 이것들은 지금 자신의 새로운 길과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과거를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삼아버리는 과도기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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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보지 않는다 - <해피 아워>
(본 글은 지난 2016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단 한 번 본 이후 다시 보지 않은 상태에서 9개월만에 기억을 더듬으며 쓴 글입니다. 몇몇 부분이 '누락된 숏'일 확률이 높음을 감안하고 읽어주십시오.)
후미의 소개로 '이상한' 워크숍에 참여한 준 일행이 워크숍 뒤풀이에 참여한다. 워크숍의 '이상함'의 의도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 한참 잡다한 수다가 오가던 도중, 마찬가지로 워크숍에 참여했(으며 자판기 앞에서 사쿠라코에게 플러팅을 했다가 퇴짜를 맞자 그냥 아는 사이라도 되자는 의도였다는 되도 않는 구라를 치며 되려 사쿠라코를 힐난하는 등 한심하고 찌질하게 굴었)던 남자 카즈마가 상대의 외도에 의해 이혼했던 경험을 문득 털어놓으니 그와 같은 경험을 했던 아카리가 거기에 동조해 열을 낸다. 곧이어 준이 갑작스레 자신이 외도를 저질렀으며 현재 이혼소송 중임을 고백한다. 순식간에 공간을 채우는 배신감과 당혹감의 공기에 뒤풀이 자리가 험악해진다. 당연하지만 여기까지의 대화는 계속 180도 가상선에 의거한 O.S. 숏으로 이어진다. 이 때 준을 향해 갑작스레 정면 단독 숏이 들어온다. 그녀의 시선은 잠시간의 동요에 제자리를 못 찾다 정면의 카메라를 향한다. 자신을 들여다보이는 듯한 당혹감과 그녀의 시선이 대체 극 안에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막 생겨날 즈음 그녀에 시선에 대한 리버스 숏이 들어온다. 리버스 숏의 주인공은 해당 워크숍의 강사 우카이로, 그의 시선 역시 정면의 카메라를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라고 관객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이 이전까지 써온 O.S. 구도를 여기서도 쓰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영화에서의 루틴, 혹은 제도라고 해야 할까(아카리라면 '기준'이란 단어를 쓰자고 했을지도?), 영화를 찍는 이들의 의식 깊이에 '이 순간은 이렇게 찍어야만 한다'고 새겨져있는 영화 문법이 있다면 180도 상상선에 기반을 둔 O.S.의 숏-리버스 숏 구도가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숏-리버스 숏 구도는 인물 간의 심리극을 카메라의 각도와 인물의 위치의 조정을 통한 가시적인 대면극으로 묘사해, 시선의 교착에 있어 상대의 얼굴을 향하는 초점을 직접 찍을 수는 없다는 영화의 한계를 은폐하고 극적 상황이 구성 숏으로 나뉘는데서 오는 위화감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최소 두 명의 인물이 프레임 안에 있어야 하며, 설사 카메라가 한 명만 포착한다고 해도 관객이 영화를 안정적으로 보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도록 카메라 바깥에 있을 상대의 위치를 향해 각도를 틀어야함은 당연한 전제다. 하지만 어떤 감독들은 제도로서의 180도 규칙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영화'에 맞서왔으며, 이 계보는 (오즈 야스지로가 시초라는 데이빗 보드웰의 착각과는 달리) 꽤 오래되었다. 이를 테면 고전기 할리우드 감독들(대표적으로 빈센트 미넬리)은 초기 유성 영화의 기술적 체계의 조악함을 감추기 위해 숏-리버스 숏 구도보다 미디엄 숏의 무빙-롱 테이크나 투 숏 위주의 씬 진행 중간에 한 인물의 단독 숏을 끼워넣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특히 존 포드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숏-리버스 숏 구도로 찍어야 할 때엔 - 예컨데 <청년 링컨>의 강변 씬처럼 - 안정적인 180도 상상선을 대담하게 파괴하며 영화의 파열점을 과시적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혹은 (스트라우브-위예가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한)공간 안에서 인물 각자가 배정받은 방향과 위치를 유추할 수 없는 '평탄한' 각도의 숏들을 연결하거나 시선을 허공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시공의 원근을 평면화해, 마치 인물들이 고해성사에 가까운 독백을 하는 듯 보이게 하는 사샤 기트리와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또 어떤가.
나는 지금 O.S.의 숏-리버스 숏 구도를 부정하는 기법들만이 훌륭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관습이고 편리하며 '제도'라는 이유만으로 숏-리버스 숏 구도를 간편하게 남용하는 영화들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시선의 작동만큼 (아무리 벗어나려 한들 결국엔 '시각' 예술인)영화의 본질을 건드리는 테마는 없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 없이 180도를 그리고 이에 맞춰 인물을 배치하고 카메라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는 것은 얼마나 '안전'하며 더 나아가서 태만한가. 그러니까 이 구도를 '제도'의 편의를 넘어서 시선의 한계점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면, 숏-리버스 숏 구도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분열시키는 방식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숏-리버스 숏 구도를 구현하거나(최근의 개봉 영화 중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서 밀어붙이던 영화는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과 구로사와 기요시의 <크리피>였다) 다른 (기술적)방식으로 숏-리버스 숏을 구현함으로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해피 아워>를 보고 받은 감동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해피 아워>에서 이 두 방식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개의 '제도'를 부수는, 숏-리버스 숏 구도의 정치성을 탐구하는 영화 작가의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려 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제도' 중 하나는 영화 기법에의 제도로서의 180도 규칙 - 더 나아가 시선의 교착 - 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 사회의 제도로서, 개인을 억압하는 관습이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두 제도가 영화 안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80도 규칙이 개인을 억압하는 현실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다 생각한다. 180도 규칙의 '제도'라고 했을 때, 이는 (위에서도 말했듯)가시적인 초점극으로서의 화면 구현을 위해 화면 안에 2인 이상이 있어 서로에의 대면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어야 한다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때 인물들간의 시선의 교착은 인물들을 주변으로 카메라가 그리는 영화의 원의 '형상'에 대해 상대가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 곧 감정선의 단절을 방지하는, 일종의 구심력 역할을 하는데, 이는 이 구도가 시선의 교착을 매개로 한 '연대'의 장으로서의 화면을 형성하게 만든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근심은 바로 180도 규칙에서 드러나는 이 '연대'의 부정적 표출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의 부정적 표출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고통이 그 고통 자체로 독립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기어이 복수의 인물들을 끌어들이며 타인과의 시선의 교착을 매개로 한 '공감' 속에서 고통을 은밀하게 희박화함으로서 모순과 갈등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환경-제도가 그것이다. 아무리 긍정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 한들, 종종 '연대'라는 것은 이런 파시즘적인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준이 자신의 외도 사실을 그룹에 알리지 못했던 것은 하여튼 이 그룹의 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영화는 케이블카의 등방향성과 안개 낀 산의 정자에서의 피크닉 씬에서 각각 아카리와 후미, 준과 사쿠라코로 나뉜 의자의 위치와 이를 (경직된 듯 보인다는 의미에서)'정직하게' 포착하는 숏-리버스 숏 구도를 통해 이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기할 180도 규칙에 대한 이의 제기, 혹은 더 나아가 시선의 문제의 테마티슴을 수줍게 언지해주고 있다. 아직 준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이며 사쿠라코만이 이를 알고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상식적'으로 진행되는 숏-리버스 숏 구도는 처음부터 4인방 내부의 관계를 인물의 위치와 숏-리버스 숏 구도의 운용을 통해 드러낸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준이 '비밀'을 밝히기 전까지는 (이를 테면 워크숍 시작 직전에) 서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서로의 시선을 맞댈 수 있는 원형의 구도로 서고, 그 이후 함께 온천 여행을 갔을 땐 등방향성의 직선의 구도로 서고 걷는 것이다. 혹은 준이 행방불명된 직후의 회동에서 사쿠라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기준'을 중요시하는 아카리의 독선적인 면모를 힐난하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때, 카메라는 그녀의 단독 바스트 숏을 핸드핼드로 포착한다. 처음으로 사쿠라코에게 허락된, 혹은 그녀가 받아들인 '연대' 없는 단독 숏(사실 이 때 화면 구성이 지나치게 심리적으로 흘러가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사쿠라코의 이러한 결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에 대한 비난에 분개해 사쿠라코의 힐난을 받아치는 아카리의 리버스 숏은 냉정하게도 픽스-O.S.다. 시선의 교착과 제도화된 180도 규칙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룹의 연대를 부정하려는 사쿠라코의 '불화' 시도는 아직 이 연대의 제도에 무의식적으로 연연하며 180도 규칙을 고집하는 아카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서로의 태도를 수긍하고 차이를 긍정할 수 없는 이들은 결국 연대의 체제를 의심하고 토론할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불화만을 남기고 이 회동을 파하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180도 규칙의 숏-리버스 숏 구도가 사용되는 다른 순간들에서 볼 수 있듯, <해피 아워>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 나이와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으로 인해) 집단 너머의 '개인'으로서 온전히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선의 교착으로 지속되는 연대에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며, 이 '온전한' 원의 형상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행위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 카페에 갈 때만 해도 분노의 무게를 발에 힘껏 실은 듯 빠르게 걷던 아카리가 이 회동 이후 (평소에도 덤벙대는 편인) 직장 후배 유즈키를 필요 이상으로 힐난하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왼발을 크게 다쳐 - 계단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파국의 단초로 작용한다 - 남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처신을 못하게 된 것은 관계의 무게중심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지나치게 고집한 결과일 것이다. 1
여기서 이상해지는 것은 준의 (전)남편 코헤이의 극적 위치이다. 준이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그는 말로만 존재하거나(워크숍 뒤풀이), 화면 안에 있어도 직접 인물들과 시선을 교환하거나 말을 섞지 않거나(법정), 심지어는 직접 말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역광에 의해 까만 물체가 되어 제대로 된 '얼굴'을 부여받지 못하는(준의 집) 등 화면 속의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시선을 작동시킬 수 있는 캐릭터로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준이 행방불명된 직후에야 그룹의 회동에 참여해 주체적인 본연의 얼굴과 시선을 지닌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이 남자는 이미 자신에게 심적으로 '죽임을 당한' 준이 끊임없이 자신을 거부함에도 끊임없이 재결합을 요구하는, '연대'에 집착하는 부류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의 캐릭터성을 지우는 방식엔 분명 그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선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준이 영화 속에 있는 한 코헤이 당신은 영화의 '캐릭터'가 되어선 안 된다, 타인과 조금의 연대의 기미도 보여선 안 된다, 당신의 입장을 듣는 건 준이 영화 바깥으로 나간 이후로 족하다' 라는, 영화가 다루는 문제의식 이전의 '원론적인 문제'에 대한 하마구치의 비판적 결단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180도 규칙의 (가짜) 연대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연대가 <해피 아워>에 있다. 영화는 종종 워크숍이 진행되는 강당, 지하철역의 벤치, 자가용 차 안, 버스 안, 법정, 절벽을 앞에 둔 길거리, 낭독회, 클럽, 바다를 앞에 둔 테라스의 벤치 등 시선의 등방향성이 전제되는 공간에서 주요 사건을 진행시키는데, 이 공간의 나열에서, 이 영화가 취하는 등방향성의 사건/공간 대부분이, 복수의 사람들의 시선이 상황 안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퍼포먼스를 향하기 위한 기능-공간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해피 아워>가 다루는 건 퍼포먼스와 이를 바라보는 관객간의 (히치콕식의) 시선의 윤리학이 아니라, 하나의 퍼포먼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다수의 관객들간의 관계, 즉 평행의 시선의 물리학이다. 하나의 퍼포먼스 앞에서 같은 벡터의 평행한 등방향성을 취하는 관객들은 같은 것을 바라보며 비슷한(같을 수는 없다) 감정을 공유하는 일시적인 연대 관계에 있으나, 퍼포먼스에서 시선을 오랫동안 떼거나 감정을 과도하게 분출하는 것이 이 일시적 관계의 유지를 위협함을 알기에, 4인방이 준의 재판에 방청객으로 참여해 준의 자리에서 준이 처한 사태를 직시하려하던 것처럼, 또는 절벽 앞에서 후미의 남편 타쿠야가 그의 담당 작가 코즈에와 다정히 계단을 내려가는 광경과 마주쳤을 때 후미를 제외한 일행이 그 광경 안으로 개입하는 대신 평정을 가장한 채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처럼 시선의 평행선에 대해 강도를 약화한 감정의 내용을 매우 경미한 진동에 실어 전한다.
하지만 이 평행 시선의 직선의 연대는 한 지점에 대한 시선의 부자유스런 집중을 필요로 하며, 파국의 징후에 대해서도 연대에 위협이 되지 않는, 매우 소극적인 제스쳐밖에 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 180도 규칙의 원형의 연대에 대한 완전한 대안은 될 수 없다. 낭독회에서 타쿠야가 코즈에를 향해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걸 보고 있음에도 당장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후미의 어정쩡한 위치는 이 연대의 맹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게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중심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중심)을 기여코 되찾기 위해서 자신과 소통하는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고집을, 모두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라는 우카이의 말이 일러주듯, 혹은 의자의 무게중심을 찾기 위해 의자를 잡아 흔들거나 몸을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여 신체 중심선을 찾아내는 그의 작업이 보여주듯 일반적으론 과잉으로 보이는 어떤 움직임이나 반동, 즉 (일탈이 아닌) 파국과 간극의 긍정없이 주체로서 제대로 된 중심을 잡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해피 아워>의 인물들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그 자체로서 안정의 형태를 추구하는 연대는 파시즘적(!)인 무언가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절규하듯 질문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그 위선에, 가짜 연대에 매몰되려는 유혹에 빠진 이들은 어떻게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가?
4인방의 '가짜' 친밀함을 드러내는, 초반부 정자 씬에서의 숏-리버스 숏 구도는 이후 단체 온천 여행에서 마작을 하던 도중 타자의 상태로 돌아가 첫 인사를 나누는 순간 개개인에게 올바른 상상선을 비튼 정면 원 숏을 할애해 숏 내부에서의 시선의 연결을 원천봉쇄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여기서 카메라 너머의 허공을 향하는 말과 시선은 그 어떤 '올바른' 형상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위태롭게 분열된 형태를 형성한다. 그러나 구도의 붕괴처럼 보이는 이 연결이 곧 재설정된 구조라면? 이 거친 연결이 제도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연대의 '올바른' 형상, 즉 카메라의 쌍방향성의 원형이나 집중성의 직선 따위를 폐기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면? 이 구도의 구조가 바로 <해피 아워>의 핵심, 다시 말해 하마구치 류스케가 제안하는 연대의 양식이다. 위에서 나열했던, 영화가 취하는 등방향성의 상황들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준이 사쿠라코의 남편 요시히코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등방향성을 취했고 자가용 자동차라는, 육체의 방향의 부자유가 담보되는 공간에 있었으므로 평행 시선의 직선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쉬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시히코는 준에게 "사쿠라코와 가까이 지내지 말아주겠어"라는 잔혹한 주문을 고할 때 준은 이를 기꺼이 수긍한다. 이 대화는 기존의 연대를 붕괴시키려는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엔 연대라고 할 만한 감정의 유대 - 사쿠라코를 생각하는 마음일까? - 가 희미하게 유지되고있고, 그렇기에 준은 일말의 반발 없이 요시히코가 제안하는 붕괴를 받아들인다. 이 순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영화 속의 다른 시선의 연대들과는 달리, 그들이 취하고 있는 연대에는 시선의 집중성이나 교차성이 담보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시선은 작동하지만 서로를 보다 정확히 지각하려는 감각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고 있지 않다. 시어머니와 함께 거리를 걷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함께 걷고는 있지만 시선을 마주할 필요는 없는 평행의 걸음을 취함으로서 전에 없던 유대를 경험한다. 엄연히 자신과는 다른 상대를 자신의 시선과 숏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시도를 폭력으로 판단해, 각자의 개별성을 단단히 응고시킨 상태에서 허공을 향한 '뒤틀린' 시선을 작동시켜 숏-시선-개인간의 단절된 연결 상태 그 자체를 연대의 형태로 재설정하려는 순간 연결은 간극의 긍정을 통해 부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며 끌어오는 힘을 지니게 된다. 뒤풀이 씬의 구조 안에 준과 우카이의 정면 숏의 연결이 태연하게 들어갈 때, 지금껏 열띠게 진행된 모든 대화가 요설이 되어버리고 오직 두 단독 정면 숏의 묵묵한 연대만이 단단히 남아 '폐허'를 이루어 준의 (모든 관계를 0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파국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2숏-시선-개인의 연대는 단순한 인물과 카메라의 위치 조정을 넘어 관계의 무게중심을 세우기 위한 반동과 그 장, 다시 말해 파국과 폐허를 긍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아카리가 병원 테라스에서 후미와 마주할 때, 억지로 후미와 시선을 교환하려 하지 않고 그녀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려 하는 제스쳐는 드디어 아카리가 연대의 양식을 바꾸었다는 증거일 테다. 즉 과거의 '상식적'인 연대, 이해와 공감에 그 바탕을 두고 시선의 교착 혹은 집중을 매개로 이루어지던 연대는 지금 우리에게 걸맞는 연대의 양식이 아니며, 이를 거부하고 파국의 반동을 긍정해 본래의 개별성을 지킨 상태로 관계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연대의 양식이라고 <해피 아워>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문득 우카이가 3.11 이후 폐허가 된 토호쿠 지역에서 처음 자신의 '활동'을 시작했다는 걸 상기하고, 하마구치 류스케가 3.11 이후를 '개인적으로' 관통한 영화 작가라고 확신하게 된다. 3.11을 관통했던 동시대 다른 영화 작가들이 -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 아오야마 신지의 <속죄 소나타>, 소노 시온의 <두더지> 등 - 3.11을 통해 절망적인 세대론이라는 거시적 현실을 보았다면, 직접 토호쿠로 건너가 3.11 이후를 버티는 개인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 3부작을 찍었던 하마구치는 우리 눈 앞의 모든 것이 붕괴 전야에 처해있음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한다는, 다분히 개인적인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해피 아워>는 다큐멘터리 연작 이후 그의 첫 장편 극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해피 아워>라는 제목의, 혹은 5시간 38분에 달하는 기나긴 러닝타임의 의미는, '너'와 '나'라는 단어 사이의 간극을 긍정함으로서 다시금/제대로 맞춰질 관계의 균형을 위해 기약없이 지속되는 반동과 그 기류가 형성하는 ('폐허' 위에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아닐까.
+
<루이 14세의 죽음>, <설리>,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해피 아워> 등 2016년의 영화들이 한 발이 불구 상태인 이들을 다루며 무의식적인 공명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설리>의 경우에는 좀 다른 방식이고, 그것이 <설리>를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영화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본 누구도 안토니오니의 <모험> 얘기를 안 하는지 의문인데(일본인 친구들은 오히려 리베트 대신 카사베츠를 언급했다), 물론 거의 리얼 타임으로 진행되는 후반부나 <아웃 원>을 연상시키는 워크숍 씬과 뻔뻔하게 초현실적인 항구 씬 혹은 계단의 사용 방식에선 확실히 리베트가 떠오르고 무내용적이라 할 만큼 단순한 내러티브를 견인하는 걸 넘어 영화의 결을 다층적으로 만드는 대화의 쉼 없는 연쇄에선 분명 로메르가 떠오르긴 하며 허나 무엇보다 크게 드리운 건 오즈와 나루세의 그림자이지만 이 영화는 '세계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방식과 (영화 중반에 불가해한 실종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준이 아니라)마지막에 홀로 남은 아카리의 뒷모습에서 암시되듯, 이젠 어느 정도 고리타분해진 <모험>의 도덕과 화해의 테마의 개정판으로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시미즈 히로시부터 이구치 나미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여러 일본 영화들은 물이 평면 위에 범람하는 공간, 즉 바다를 생의 공간이라기보단 저승으로의 경계로 묘사해왔으며, 많은 인물들은 바다 앞에서 바다에 둘러쌓인 채(이상하게도 그들은 바다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인다) 바다 너머로 떠날 작은 의식을 수행했다. 말하자면 범람하는 물의 시학은 곧 별리의 징후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부터 뭔가 이상해졌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경계로서의 물의 범람은 광활한 평면인 바다가 아니라 작은 폭포에 불과하고, 이 역시 소년의 디에게시스로는 '떠나는 공간'으로 묘사되긴 하나 미즈키의 아버지가 잠시 이승으로 돌아와 미즈키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을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최후반부, 최후의 목적지인 해안가에 이른 부부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씬을 돌이켜보면 여기가 해안가라는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시각적 기호는 시야에서 가려져있으며(그들을 축으로 원형을 그리는 트래킹은 바다를 섬세하게 가리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 해안가다운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라는 청각적 기호만이 고조되어, 망자인 유스케가 떠나간 후 그의 흔적들을 불태운 미즈키가 해안가를 뒤로 할 때에야 비로소 바다는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조심스레 드러낸다(<동경 이야기>와 <산쇼 다유>에 대한 재해석일까?). 어느새 바다는 명징한 '죽음' 앞에서도 스스로의 모습을 확고히 드러내길 거부하며 경계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해피 아워>에 이르러 바다는 꿈(으로 보이지만 정말 꿈일까)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확고히 노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차안에서 떨어진 초현실의 공간임이 드러나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바다는 관객의 시각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며 인물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그저 화면의 한 켠을 소소하게 장식하는 하나의 직선에 불과해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이것은 3.11 이후의 징후일까? 하지만 3.11의 징후라면 오히려 바다는 더더욱 경계로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제 일본 영화에서 바다는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인가? 이는 현재 내가 천착하고 있는 물의 스크린성이란 주제와 매우 밀접하다.
- 1.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두 사람, 하나는 다리가 부러져도 걷지만 하나는 멀쩡하나 주저 앉고만다. 생각해보면 <해피 아워>에서 계단 아래로 넘어지는 두 사람의 차이는 자신의 (하이데거의 말로서)'고독'을 기꺼이 긍정하느냐 아니냐, 혹은 고독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그것이 육체로 표현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본문으로]
- 2. 이 때 '폐허'란 이를테면 준이 행방불명된 직후 사쿠라코가 빨래를 널고 나서 테이블에 엎드려 꾸는 꿈(이라고 일단 편의상 칭하지만 정말 꿈일까? 사쿠라코의 아들은 이 이후로 등장하지 않으니 우리로선 확신할 수 없다)에 배가 부풀어오른 준과 애인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쿠라코의 아들이 만나는 항구, 후미가 기차의 영향(그녀에게 기차는 안정성에의 갈망의 형상이다) 없이 홀로 걷는 새벽녘의 귀갓길, 후미와 아카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병원의 테라스처럼 개인이 된 자신(들)말고는 아무도 없는, 세계 이후의 세계를 이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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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에 대한 메모
1.
영화의 최후반부, 우리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캐롤과 헤어지고 파티장에 온 테레즈가 누가 봐도 레즈비언임이 확실히 암시되는 여성과 얘기를 나누는 그 짧은 순간을 포착할 때 감독이 카메라를 건물 밖으로 내보냄으로서 어둠 속에서 좌측 창에는 테레즈와 그 여성이, 우측 창에는 헤테로 커플만이 보이도록 배치한 것을 보았다. 시나리오에 쓰여진, '테레즈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서사적 기획 그 자체만을 카메라에 포착하고자 했다면 카메라를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등의 수고스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때 토드 헤인즈가 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곳라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측의 헤테로 커플은 자신들 사이에 있는, 세로로 길게 난 사변형의 창틀이란 경계를 상대적으로 자유로이 넘나드는 반면, 테레즈와 그 여성은 자신들 사이에 있는 창틀을 결코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그 여성이 테레즈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손을 휘젓는 제스쳐를 취하자 테레즈는 창틀 안 쪽을 향해 살짝 뒷걸음질을 친다. 이 바로 다음 숏에서 테레즈가 홀로 갑갑한 화장실에 틀어박힌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엔 테레즈가 캐롤을 선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창틀의 사각형이 그 여성과 테레즈 사이의,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심리적인 간격에의 경계로서 작용한 게 아닐까?(지금 막 든 생각, 거시적으로 볼 때 이 때의 창틀은 성적 지향에의 프레임, 혹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의 프레임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경계로서 작용하는 사각형은 <캐롤>의 곳곳에 숨은 채 관객에게 은밀하게 인물의 심리 상태를 언지해준다. 파티장에서의 시끄러운 소외를 견디지 못해 홀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던 캐롤과, 그 옆에 다가와 캐롤을 귀찮게하던 노부인 사이에 창틀이 있으며, 노부인이 캐롤에게 다가가려하는 순간 캐롤은 살짝 뒷걸음질치며 창틀 안으로 숨어든다(이 순간은 위에 언급한 숏의 운동을 미리 제시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는 게 그 예 중 하나다. 캐롤에게 노부인의 제스쳐는 함부로 나의 창틀, 나의 세계에 침입하려는 무례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개인의 심리적 경계로서의 사각형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캐롤과 테레즈가 이별한 후 캐롤이 운행중인 택시 안에서 창틀에 갇힌 채, 즉 이중의 사각형에 갇혀 창 밖에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테레즈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순간(재밌는 것은 영화 초반부에 테레즈가 이와 똑같은 행동을 취해 영화가 반전 구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은 또 어떤가.
문 역시 사각형이기에 다르지 않은데, 이를 테면 테레즈가 캐롤의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지를 만나는 씬에서, 하지와 캐롤은 부엌에, 테레즈는 거실에 배치된 상태에 카메라가 (서로를 걸지 않고)두 상황을 각각의 문턱이라는 사변형에 따로 가둬놓는데, 이 때 심리적 경계으로서의 문턱(과 서로를 거의 충돌시키듯 이어가는 쇼트)은 캐롤&하지/테레즈가 서로에 대해 고립되 보이게 만들어 이들의 간극에 좁혀질 기미가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로 그 직후 하지가 집에서 나가기 위해 부엌의 문턱을 넘어 감히 테레즈의 문틈을 침범할 때 테레즈가 하지를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나는 것은 그 행동이 자신의 심리적인 사각형을 하지라는 침입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테레즈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 대책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각형의 긴장이 가장 흥미롭게 발현되는 순간은 리차드와 테레즈가 결별을 선언하는 때인데, 여기서 말하는 흥미로움이란 이 씬에서 단 한 번도 둘이 같은 방에 속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리차드가 다소 폭력(물론 남한에서라면 폭력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단정하다만)적인 태도로 자신과는 다른 방에 있는 테레즈를 쫒아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테레즈는 마치 꼬리잡기를 하듯 순식간에 리차드가 속한 방과는 다른 방으로 도망친다. 이런 꼬리잡기가 몇 번 반복되어 마침내 리차드가 안방에서 테레즈를 따라잡았을 때조차 테레즈는 리차드가 속한 청녹색으로 칠해진 벽지에서 뒤로 살짝 물러나 또 다른 사각형, 즉 무채색의 하얀 벽으로 도망쳐 그와 자신의 심리적 경계를 확고히 한다. 이는 테레즈가 할 수 있는, 자신의 사각형을 침범하는 이에 대한 최대한의 방어인 것이다.
그런데 테레즈가 텅 빈 신문사 안에서 시네필(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키스할 때는 내가 위에서 열거한 사례들과는 다르다. 물론 이 때 역시 심리적 경계로서의 창틀이 둘 사이를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분명 그 시네필은 테레즈의 창틀을 갑작스레 침범한다. 그럼에도 이 씬은 매우 단정하고 낭만적으로 찍혀있다. 적어도 이 장면에서 큰 거부감을 느꼈다는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내겐 없다. 이것은 남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본작에서 남성-여성간의 육체적 관계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멜로 드라마다운 관능성을 품은 채 표현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때의 긍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실 아주 단순하다. 테레즈가 그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 열거한 사례들은 테레즈 혹은 캐롤이 자신의 사각형을 침범하는 상대의 액션을 폭력으로 인지하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경우다. 허나 이 씬의 경우 테레즈는 그 직후 그 자리를 떠나긴 하지만 시네필의 키스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 아니, 끝까지 그녀를 지지해주며 동시에 끝까지 테레즈가 호의적으로 대하는 남성은 오직 이 시네필 뿐이다. 사각형의 긴장이라는 영화 전체의 맥락 속에서 상대가 어떤 호의를 가진 채 접근한다 할 지라도 본인이 싫다면 싫은 것이다, 라는 보편적(이나 보편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도덕을 토드 헤인즈는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도청업자에 의해 여행을 중단하고 도시로 돌아가던 도중 캐롤이 운전을 멈추고 테레즈에게 안겨 오열할 때 카메라가 본래 있던 자리인 차의 측면에서 컷을 끊어 정면으로 옮겨간 것 역시, 차의 정면 유리에 붙어서 그 둘을 가로막고 있는 틀을 포착해 사각형의 긴장을 포착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고로 이 순간에 발화하는 아련함은 무엇보다 창틀에 대한 캐롤의 도약에서 나온다. 한 번도 테레즈와 자신간의 경계를 깨지 않으며 자신의 약한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던 그녀의 첫 감정적 도약과, 내심 캐롤이 자신에게 기대길 바랐던 테레즈의 캐롤에 대한 포옹이 이 씬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촉촉한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캐롤>은 경계의 간극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운동들을 통해 액션 만큼, 혹은 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시각적으로 역설한다.
2.
캐롤과 테레즈가 문턱을 경계로 둔 같은 높이의 다른 공간, 그러니까 각각 이중의 방에 있을 때, 카메라는 종종 테레즈 가까이에 서서 태레즈와 캐롤을 함께 포착한다. 이 때 캐롤은 원근법에 의해 테레즈보다 위에 위치한다. 고로 캐롤이 테레즈에게 다가갈 때, 대개 이는 강림의 형태를 띠게 된다(ex: 캐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테레즈에게 다가갈 때). 혹은 역으로,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에 테레즈는 캐롤의 부탁에 의해 캐롤의 '방'으로 '올라간다'(ex: 샤워 중인 캐롤이 테레즈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할 때). 그렇기에 캐롤이 처음 테레즈의 집을 방문하는 씬에서 카메라가 테레즈의 집 깊은 곳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현관문이라는 사각형의 경계에 서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또 캐롤의 위치에서 테레즈를 (원근법적으로 위에 두는) 리버스 숏이 없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엔딩 씬이 감동적인 것은, 물론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으나, 무엇보다 그 순간 캐롤이 테레즈에게 부탁한 것이 테레즈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즉 캐롤이 원한 것이 테레즈가 가지고 오는 무엇이 아닌 테레즈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또 그 때 강림하는 주체가 다름아닌 테레즈이기 때문이다.
3.
왜 테레즈는 부모가 없는가. 테레즈는 많아봤자 20대 후반밖에 안 되었을, 매우 젊은 여성이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살림을 꾸린 여성이 (부모와 연을 끊고) 홀로 살아도 별 문제 없을, 제대로 된 경제적 기반을 갖췄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치 부모가 아예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리차드와 결혼 얘기를 하면서도, 리차드의 부모 얘기는 살짝이나마 나오지만 그녀의 부모 얘기는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캐롤과 여행을 갔을 때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누구와 어디로 여행을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우주에서 떨어진' 사람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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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경험에 대하여
직관은 감성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국한돼 있는 한에서의 직관은 감성적이지만, 선험적인 직관은 능동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달의 한쪽 면만을 볼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달의 반대쪽 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의 능동성의 간단한 예다. 또 이것은 동시에 선험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달의 반대쪽 면을 경험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직관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추리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달의 모습, 즉 형태, 색상 등등 여러 감각적 성질들은 그것에 신경쓰인 인간에게만 존재하지만 달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입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에 관여하는 부분은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순전히 존재의 형식일 따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달을 지각했을시의 형상과 지각하지 않았을 때의 달의 형상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두 점 사이에서의 직선은 가장 짦은 선이다'의 명제는 경험 판단입니다. 기하학에서의 모든 대상들은 우리에게만 존재하며, 우리는 실제로 직선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선을 그려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감각에 의해 직선과 근접해 있는 선을 직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와 즉 공간과 다른 어떤 곳의 공간에서는 이 명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든 선험적 인식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직관과 사고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올바른' 감각적 인상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자체가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만약에 시간과 공간의 표상이 우리에게 부재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일해 질 것이다. 그러나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경험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이 불가능해 질 것이다. 순수한 선험적 인식은 존재하지 않다.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경험적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선험을 지칭한다.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진상이 오직 경험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경험하지 않고도 무엇을 직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으니. 우리에게 순수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의 능력에 자연의 법칙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간다는 사실에 있다. 경험적 직관은 단적으로 하나의 상이다. 그리고 경험적 직관은, 칸트가 말했듯 항상 수용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어떤 하나의 상을 산출해내는 능력이 존재한다. 스스로 전체인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학문의 진보는 단적으로 이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개념적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순해질 것이며, 또 학문이나 역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적 인지능력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기억과 직관의 인과성에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개념 능력이 거의 없는 동물들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이다. 동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적 인지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동물은 직관에 의한 인과성에 대한 포착과 희미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명 동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표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물은 충분히 현실적으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경험의 전후에 대한 시간적 관계를 단수나마라도 포착할 수 있다. 시간 표상이 없더라도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지각은 광상곡이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라도 경험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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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에 관한 짧은 생각
얼마 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을 뇌내재생하다가 이 영화가 끊임없이 극단의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옥같은 더위로 가득 찬 평민들의 땅과 에어컨이 있어 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향유할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성, 불이 꺼진 방과 불이 켜진 방, 딱딱하고 비싼 구닥다리 구두를 파는 늙은 부르주아와 싼 엉터리 구두를 팔려는 (상대적으로) 젊은 부르주아들, 아들을 잃었으나 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기사와 모든 걸 가졌으나 돈을 내지 않으면 한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임을 아는 갑부 곤도(이 둘은 서로 멀리 떨어진 반대편의 벽 만을 바라보며, 또 곤도가 기사에게 다가가면 기사는 그 자리를 피한다), 아들을 구하고자 자신을 버리려 하는 기사와 돈을 위해 아이를 버리려 하는 비서(이 둘은 옷 색도 백과 흑으로 대비된다), 편히 앉아있다가 커튼을 열자 숨기 위해 바닥에 누워버리는 형사들, 끈질기게 한 공간 안에서만 전개되는 전반부와 끊임없이 공간을 바꿔나가며 진행되는 후반부, 선한 부르주아인 곤도와 악한 프롤레타리아인 범인, 결국 마지막까지도 극단의 상황에 대한 화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둘 사이의 간극만을 재확인하게 만들며 (초반부 갑부의 집의 '커튼'이 세로 방향으로 닫히는 것과는 상반되게) 가로 방향으로 내려가 둘 사이를 단절시켜버리는 '셔터'. 영화는 이렇게 두 이미지들이 현실에서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결국 이 세상에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처럼. 물론 단 두 번, 갑부의 아들과 기사의 아들의 옷이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장면과 범인이 갑부와 마주하여 담뱃불을 빌리는 장면에서 구로사와는 이 두 계층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그 장면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버린다. 결국 한 아이는 사라지고, 한 남자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서로의 깊고 넓은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좁혀지지 않는 이 간극은 <거미의 성>이나 <란>의 절망 보다도 더 염세적이고 고통스럽다. 대체 구로사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구로사와의 가장 끔찍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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