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에 대한 메모

행진하는 영화 2016. 6. 30. 22:57

1.

 

영화의 최후반부, 우리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캐롤과 헤어지고 파티장에 온 테레즈가 누가 봐도 레즈비언임이 확실히 암시되는 여성과 얘기를 나누는 그 짧은 순간을 포착할 때 감독이 카메라를 건물 밖으로 내보냄으로서 어둠 속에서 좌측 창에는 테레즈와 그 여성이, 우측 창에는 헤테로 커플만이 보이도록 배치한 것을 보았다. 시나리오에 쓰여진, '테레즈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서사적 기획 그 자체만을 카메라에 포착하고자 했다면 카메라를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등의 수고스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때 토드 헤인즈가 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곳라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측의 헤테로 커플은 자신들 사이에 있는, 세로로 길게 난 사변형의 창틀이란 경계를 상대적으로 자유로이 넘나드는 반면, 테레즈와 그 여성은 자신들 사이에 있는 창틀을 결코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그 여성이 테레즈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손을 휘젓는 제스쳐를 취하자 테레즈는 창틀 안 쪽을 향해 살짝 뒷걸음질을 친다. 이 바로 다음 숏에서 테레즈가 홀로 갑갑한 화장실에 틀어박힌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엔 테레즈가 캐롤을 선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창틀의 사각형이 그 여성과 테레즈 사이의,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심리적인 간격에의 경계로서 작용한 게 아닐까?(지금 막 든 생각, 거시적으로 볼 때 이 때의 창틀은 성적 지향에의 프레임, 혹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의 프레임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경계로서 작용하는 사각형은 <캐롤>의 곳곳에 숨은 채 관객에게 은밀하게 인물의 심리 상태를 언지해준다. 파티장에서의 시끄러운 소외를 견디지 못해 홀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던 캐롤과, 그 옆에 다가와 캐롤을 귀찮게하던 노부인 사이에 창틀이 있으며, 노부인이 캐롤에게 다가가려하는 순간 캐롤은 살짝 뒷걸음질치며 창틀 안으로 숨어든다(이 순간은 위에 언급한 숏의 운동을 미리 제시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는 게 그 예 중 하나다. 캐롤에게 노부인의 제스쳐는 함부로 나의 창틀, 나의 세계에 침입하려는 무례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개인의 심리적 경계로서의 사각형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캐롤과 테레즈가 이별한 후 캐롤이 운행중인 택시 안에서 창틀에 갇힌 채, 즉 이중의 사각형에 갇혀 창 밖에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테레즈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순간(재밌는 것은 영화 초반부에 테레즈가 이와 똑같은 행동을 취해 영화가 반전 구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은 또 어떤가. 

 

문 역시 사각형이기에 다르지 않은데, 이를 테면 테레즈가 캐롤의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지를 만나는 씬에서, 하지와 캐롤은 부엌에, 테레즈는 거실에 배치된 상태에 카메라가 (서로를 걸지 않고)두 상황을 각각의 문턱이라는 사변형에 따로 가둬놓는데, 이 때 심리적 경계으로서의 문턱(과 서로를 거의 충돌시키듯 이어가는 쇼트)은 캐롤&하지/테레즈가 서로에 대해 고립되 보이게 만들어 이들의 간극에 좁혀질 기미가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로 그 직후 하지가 집에서 나가기 위해 부엌의 문턱을 넘어 감히 테레즈의 문틈을 침범할 때 테레즈가 하지를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나는 것은 그 행동이 자신의 심리적인 사각형을 하지라는 침입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테레즈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 대책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각형의 긴장이 가장 흥미롭게 발현되는 순간은 리차드와 테레즈가 결별을 선언하는 때인데, 여기서 말하는 흥미로움이란 이 씬에서 단 한 번도 둘이 같은 방에 속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리차드가 다소 폭력(물론 남한에서라면 폭력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단정하다만)적인 태도로 자신과는 다른 방에 있는 테레즈를 쫒아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테레즈는 마치 꼬리잡기를 하듯 순식간에 리차드가 속한 방과는 다른 방으로 도망친다. 이런 꼬리잡기가 몇 번 반복되어 마침내 리차드가 안방에서 테레즈를 따라잡았을 때조차 테레즈는 리차드가 속한 청녹색으로 칠해진 벽지에서 뒤로 살짝 물러나 또 다른 사각형, 즉 무채색의 하얀 벽으로 도망쳐 그와 자신의 심리적 경계를 확고히 한다. 이는 테레즈가 할 수 있는, 자신의 사각형을 침범하는 이에 대한 최대한의 방어인 것이다. 

 

그런데 테레즈가 텅 빈 신문사 안에서 시네필(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키스할 때는 내가 위에서 열거한 사례들과는 다르다. 물론 이 때 역시 심리적 경계로서의 창틀이 둘 사이를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분명 그 시네필은 테레즈의 창틀을 갑작스레 침범한다. 그럼에도 이 씬은 매우 단정하고 낭만적으로 찍혀있다. 적어도 이 장면에서 큰 거부감을 느꼈다는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내겐 없다. 이것은 남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본작에서 남성-여성간의 육체적 관계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멜로 드라마다운 관능성을 품은 채 표현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때의 긍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실 아주 단순하다. 테레즈가 그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 열거한 사례들은 테레즈 혹은 캐롤이 자신의 사각형을 침범하는 상대의 액션을 폭력으로 인지하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경우다. 허나 이 씬의 경우 테레즈는 그 직후 그 자리를 떠나긴 하지만 시네필의 키스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 아니, 끝까지 그녀를 지지해주며 동시에 끝까지 테레즈가 호의적으로 대하는 남성은 오직 이 시네필 뿐이다. 사각형의 긴장이라는 영화 전체의 맥락 속에서 상대가 어떤 호의를 가진 채 접근한다 할 지라도 본인이 싫다면 싫은 것이다, 라는 보편적(이나 보편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도덕을 토드 헤인즈는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도청업자에 의해 여행을 중단하고 도시로 돌아가던 도중 캐롤이 운전을 멈추고 테레즈에게 안겨 오열할 때 카메라가 본래 있던 자리인 차의 측면에서 컷을 끊어 정면으로 옮겨간 것 역시, 차의 정면 유리에 붙어서 그 둘을 가로막고 있는 틀을 포착해 사각형의 긴장을 포착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고로 이 순간에 발화하는 아련함은 무엇보다 창틀에 대한 캐롤의 도약에서 나온다. 한 번도 테레즈와 자신간의 경계를 깨지 않으며 자신의 약한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던 그녀의 첫 감정적 도약과, 내심 캐롤이 자신에게 기대길 바랐던 테레즈의 캐롤에 대한 포옹이 이 씬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촉촉한 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캐롤>은 경계의 간극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운동들 통해 액션 만큼, 혹은 보다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시각적으로 역설한다.

 

2.

 

캐롤과 테레즈가 문턱을 경계로 둔 같은 높이의 다른 공간, 그러니까 각각 이중의 방에 있을 때, 카메라는 종종 테레즈 가까이에 서서 태레즈와 캐롤을 함께 포착한다. 이 때 캐롤은 원근법에 의해 테레즈보다 위에 위치한다. 고로 캐롤이 테레즈에게 다가갈 때, 대개 이는 강림의 형태를 띠게 된다(ex: 캐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테레즈에게 다가갈 때). 혹은 역으로,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에 테레즈는 캐롤의 부탁에 의해 캐롤의 '방'으로 '올라간다'(ex: 샤워 중인 캐롤이 테레즈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할 때). 그렇기에 캐롤이 처음 테레즈의 집을 방문하는 씬에서 카메라가 테레즈의 집 깊은 곳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현관문이라는 사각형의 경계에 서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또 캐롤의 위치에서 테레즈를 (원근법적으로 위에 두는) 리버스 숏이 없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엔딩 씬이 감동적인 것은, 물론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으나, 무엇보다 그 순간 캐롤이 테레즈에게 부탁한 것이 테레즈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즉 캐롤이 원한 것이 테레즈가 가지고 오는 무엇이 아닌 테레즈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또 그 때 강림하는 주체가 다름아닌 테레즈이기 때문이다.

 

3.

 

왜 테레즈는 부모가 없는가. 테레즈는 많아봤자 20대 후반밖에 안 되었을, 매우 젊은 여성이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살림을 꾸린 여성이 (부모와 연을 끊고) 홀로 살아도 별 문제 없을, 제대로 된 경제적 기반을 갖췄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치 부모가 아예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리차드와 결혼 얘기를 하면서도, 리차드의 부모 얘기는 살짝이나마 나오지만 그녀의 부모 얘기는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캐롤과 여행을 갔을 때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누구와 어디로 여행을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우주에서 떨어진' 사람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