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을 마치며: 공중의 편지

대충사는 이야기 2018. 1. 1. 11:02

올 한해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써봅니다. 왠 뚱딴지같은 편지냐며 갸우뚱할 당신의 얼굴이 벌써 선합니다만, 이건 저의 오랜 버릇 중 하나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재미없는 걸 못 버티는 버릇 말입니다. 똑같은 형식의 결산을 매년 고지식하게 되풀이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재미없는 짓이지요. (물론 쓰는 사람은 편하고 보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더 쉬울테지만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굳이 이 편지를 써 당신께 부치기로 한 게죠. 물론 그 사이에 이 결정을 가능케 한 사고의 과정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이전의 결산과는 다른 방식의 결산에 무엇이 있나 하며 고민하던 와중,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던 토픽 중 하나인 편지를 떠올렸지요. 편지의 특이성을 직접 체험하자, 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예 편지를 써보자!라는 결심이 이 결정과 결과물이 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제가 올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의 리스트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지난 한 해동안 천착했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한다는 의미에서도 결산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를 사로잡은 세 가지 토픽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지-서간체요, 둘은 (지금 여기서의!) 페미니즘 운동이요, 셋은 트렌드로서의 회귀였지요. 이 중 세번째에 대한 생각은 이미 당신께서도 읽으셨을 졸문 '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을 통해 맛보기로 논한 바 있으니, 여기서 굳이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몇 마디만 덧붙이자면, 저는 이 현상이 역사적 망각과 '신화'의 재생산의 상호보완적인 체계 속에서 '추억'이랄 것의 흔적이 거의 지워진 시대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과 공명하는 징후는 아마도 물성에 대한 고집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습니다. 역시 결국엔 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돌아온 거죠. 이에 대해선 언젠가 아주 길게 논할 자리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편지였는가? 라는 걸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사실 편지란 참 이상하지요. 이 때 편지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표현 양식으로서의 편지를 이르는 것입니다만, 이 편지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수신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그저 '이건 편지다'라고 생각하며 수신자라는 텅 빈 항을 의식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편지가 편지''으로 쓰여버린다는 게, 그렇게 성립되어버린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당장 이 편지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 즉 수신자란 나의 애인일 수도 있고, 나의 오랜 친구일 수도 있으며, 내가 얼마 전 연을 끊은 누군가일 수도 있지요. 혹은 내가 모르는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답신이 오지 않을 수 있고 아무에게도 답신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편지가 편지로서 성립되는 데에 그 어떤 지장도 되지 못하지요. 여기서 두 명의 자크가 (서로 '따로 또 같이') 배달 불가능성이라 지적했던, 편지라는 표현 양식에 내재된(혹은 내재될 수 있는) 탈구축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편지란 말하자면 '열려있는' 에크리튀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열려있음이란 수 많은 '' 사이의 수 많은 간극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고 진동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 간극들 중 하나인 시간성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편지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시차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그 존재가 정당화됩니다. 하나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시차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 시간과 이야기 시간의 시차이지요. 이를 (타자에의?) 간섭 불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얼핏 유사해보이는 표현 양식인 1인칭 소설이나 강연문과는 다른, 편지-서간체만의 위상을 만든다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발신자의) 과거가 (여러 측면에서) 비가시적인 (수신자의) 미래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말을 거는가하면, (서술 시간의) 과거가 (이야기 시간의) 대과거를 소환해 개인적인 경험을 새로이 풀이하며 미래를 향한 공통의 ()체험으로 변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편지란 이러한 간섭 불가능성의 시차가 공통의 평면 위에서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혼합하며 공존하는 '가능성의 상태'에 다름 아닌 겁니다. 가장 단순해보이는 이 표현 양식이, 실은 구조적으로 고도로 착종된 형태인 것이지요. 아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군요. 그 착종으로 인해 풍요로운 단순함을 얻었다, 라 말하는 게 적합해 보입니다.

 

모두들 작금엔 편지 따윈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작금"이 이메일이나 PC통신, SNS의 시대를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찍이 60년대에 아도르노는 서간체란 낡았다고 한 바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편지 문화가 암묵적으로 승리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 봅니다. 애초에 중세 이전에는 편지란 소식을 전하는 배달부, 즉 간극을 연결하는 선()으로서의 인간매체를 지시하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더 나아가 플루서는 아예 마리아의 잉태를 전하러 온 가브리엘의 복음적 성격을 들어 그를 편지로 인식하기도 했구요. 매체사 관점에서 볼 때 편지는 종이 필기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문체론적 기능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지금 디지털 문화 안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을 띄는 게지요다만 이젠 장문의 편지 양식이 아닌 엽서 양식이그것도 편지의 존재를 가능케하던 시차가 거의 지워진 -이 편지만 해도제가 '발행'을 누르는 동시에 당신께 (물리적으로도착할 수 있지요것이 새로운 편지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카라타니 코진이 나쓰메 소세키를 논하면서 "소세키의 18세기적인 부분이 21세기에 있어서 더욱 더 새로운 의미로 살아날 것"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편지의 '단순한' 가능성이란 아직도 미래를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올해만큼 대외적으로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강력하게 부상해 사회적 노이즈를 일으킨 해도 없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이것도 제가 앞서 비판한 역사적 망각의 한 예에 불과한 걸까요? 하지만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이후의 할리우드를 떠올리면, 혹은 유아인의 '애호박 게이트' 이후의 판국을 떠올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전에 이런 일들이 폭력으로서 이 정도로 공론화되어 문제시된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담론의 지형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게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여기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며 논하고 싶은 건, 이러한 양상을 그저 '시대가 바뀌었고 씹치들은 도태된다(혹은 그럴 것이다)'는, 거의 무지성적으로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는 관점들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바로 전형적인 '사이다' 전략이지요. 정치와 윤리(적 '캠페인')를 헷갈린 채,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막연히 중얼거릴 뿐인. 그러나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두려워하거나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필요만 있을 뿐"이지요


2015년부터 거의 폭풍같은 속도로 가시화되어 지금은 한국 사회의 주요문제적 담론, 아니 전선 중 하나로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 왜 하필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체계를 파악하지 않고선 다음 단계의 투쟁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섣불리 상처에 대한 동감을 논하거나 (이 방향은 고통 자랑과 복지론으로 추락할 위험이 상당하지요) 혐오와 유교간의 커넥션 운운하며 미개론을 펼치거나 (이 논리로 국제적인 동시성을 지닌 흐름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혐오를 그저 일관된 형태로 보는 것 (가부장제의 권위의 점진적 붕괴 '이후'의 양상 -예컨대 성재기!- 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었지요) 은 질 나쁜 농담에 불과하지요. 아니면 '진보 계몽 운동'의 축소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으려는 착실한(!) 시도이거나. '우리는 옳다'는 '캠패인적' 사고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경제, 계급, 세대 중 한 축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인 혐오'논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리 활성화될 수 있게 된 정황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투쟁의 구체적인 방식을 재고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급하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젠더 퀴어 담론이 최근 트위터 내에서 활성화된 것, 그리고 그럼으로서 ('상호교차성'이라 불리는) 소수자 담론의 내포와 외연이 어느 정도 확장된 건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만, 혹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신지 궁금해지는군요. 물론 당연하지만, 저도 이 지점에서 정말이지 열심히 해야합니다. 저 역시 여기저기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실 이 두 문단은 저 자신에 대한 꾸짖음에 가깝습니다.


다소 개인적인 얘기로 이번 편지를 끝맺을 준비를 해볼까요. 올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해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얘기이기도 하고, 저 자신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건들에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넘쳐난 해였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허한' 이미지였습니다. 어느 늦은 밤 퇴근길에 인적 없는 골목길을 가로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건물에 불이 꺼져있고 적갈색의 벽돌엔 낙서가 빼곡하여 참으로 을씨년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거기엔 그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왠지 모를 익숙함과 위화감이 있어 저를 서서히 휘감았습니다. 한참을 걷고 돌아보고 난 뒤에야 저는 그곳이 폐쇄된 재개발촌이며, 제가 아직 운동권이었을 적 어떤 재개발 반대 집회에서 연대 발언을 한 적이 있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곳곳에 붙어있거나 땅에 힘없이 널부러져있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강력하게 지시했지요. 그 이미지는 참으로 공허한 곳에서 참으로 공허한 기억과 결부되어, 그 공허함을 통하여 저의 닫힌 과거를 끌어올렸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비로소 스스로의 시간이 운동의 계절을 지났음을 실감했습니다. 앞서 "닫힌 과거"라 말한 이유는, 근 1년간 제가 오랜 기간 몸 담았던 모든 운동 단체들과의 연을 끊고 소액 후원자 및 지지자 정도로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거리로 나가 '동지'들과 함께 차벽과 방패들에 몸을 던지거나 밤새 농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 1년간 그럴만한 사태가 (거의) 벌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저는 이젠 운동권이라 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있었지요. 이는 지난 2016년의 결산에서도 밝혔듯 운동권 내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지난 촛불 정국이라는 '사건' 때문이라 해야하지요. 벌써 심적으로 지나치게 까마득하군요. 박근혜의 탄핵 선고로부터 이제 9개월이 채 안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혁명적인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이진 않았고, 본질적으로 반동적/식민적이었다 해야지요- 정국 속에서 태어난 이 반동적인 '새 시대'가, 저에게는 차라리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공포? 예, 그렇습니다. 내가 거리에서조차 언제든지 얼마든지 부정되고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말입니다(당연하지만 이것은 '보편윤리' 운운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런 감상은 '새 시대'가 저에게 억지로 안겨준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흐름을 앞에 둔 저에게는 더 이상, 혹은 최소한 지금은 거리로 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가득 찬 거리가 무섭다기보다는, 그 속에서 더 이상 '소란스러운' 소속감-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게죠. 그래서 저는 이제 오롯이 홀로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바람에 실어날린 고엽처럼.이게 정말 괜찮은 삶인지, 타인에게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올바른 처사인지 하는 생각이 종종 피어오르긴 합니다만...


이만 이 어지러운 첫번째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당신에게 답신이 올 일은 전혀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를 계속 쓰긴 쓸 생각입니다. 다음 편지들과 한참을 미루고 미룬 글들을, 가능한 빨리 완성해 부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생각대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 다음에 또 소식 전하지요. 



12월 31일



 

p.s.


올해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존 버거, 지그문트 바우만, 제리 루이스, 제임스 로젠퀴스트, 타니구치 지로, 프로디지, 그웬 아이필, 척 베리, 조너선 드미, 츠베탕 토도로프, 존 애쉬베리, 홀거 추카이, 예브게니 옙투셴코, 박상륭, 류사오보, 케이트 밀레트, 박종필, 플로 스타인버그, 스즈키 세이준, 조동진, 린다 노클린, 토브 후퍼, 마츠모토 토시오, 미카 바이니오, 다커스 하우, 조지 A. 로메로, 팻츠 도미노, 밀드레드 드레셀하우스, 해리 딘 스탠턴, 다니엘 다리유, 그리고 이스탄불, 라스베가스, 모가디슈의 익명들. '지랄같았던' 작년 이상으로 망연한 해였다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더 많은 죽음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