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자는 어디있나?: 3/22

대충사는 이야기 2018. 3. 29. 01:46


처음에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통쾌하고 유쾌하여 한 번 더 웃었다. 생중계되던 그의 집앞 상황을 보면서는 흐뭇함이 넘쳐흘렀다. 한 손은 리모콘을 들고서 생중계의 다양한 판본들을 훑느라 바빴고, 다른 한 손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이 소식을 전하고 기쁨을 공유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그가 서둘러 탄 검찰 호송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몸 속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심히 거슬리는 게 느껴졌다. 까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컥거리기도 하는 것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역한 신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만연하던 통쾌함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죽고 답답함이 이를 대신해, 빠르게 움직이던 양손은 단말기들 앞에서 초조하게 머뭇머뭇거렸다. 답답함? 그렇다. 물론 10년 전의 한 줄기 물대포로 나의 청소년기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명박의 구속에 기쁨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기쁠 수도 없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이젠 이명박마저 구속됐다. 물론 세상은 아주 조금 바뀌었으며 또 바뀌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이명박은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국정원 특활비 등 돈에 얽힌 수 많은 비리들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당장 그가 받고 있는 혐의는 약 20가지나 된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유죄는 그 누구의 미래보다도 또렷한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엔 (아직?) 용산, 밀양, 쌍용차, 강정 마을이 없다. 이 이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통령' 이명박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표적인,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들. 여전히 나에게 이명박이란 이름 세 자는 저 사건들과 오버랩 되고있는데, 이 이름들을 거론하지 않고, 그 책임을 묻지 않고서 이명박을 청산한다는 것이 대체 가능한가? 나에게 그런 "청산"이란 지난 5년의 책임에 대한 청산으로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하는, '발라버림'식의 복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의 구속 만으로 기뻐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르다. 


만약 이 구속을 그 자체로 변화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결코 바뀌지 않을 세상의 안전장치로서 미약한 변화에 불과하리라. 이 주장이 너무 나간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우리 주변에는 이 구속을 전적으로 자신들의 공이라 자랑스레 떠들며 만족스러워하는 이들이 넘쳐나지 않던가. 변화를 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균열을 내지 못할 수준에서만 허락되고 있고,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바꿀 만큼 전복적이었던 위세는 어느 새 '여기서 뭘 더 바라냐'고 대답하는, 지극히 반동적인 위세로 바뀌었다. 지난 10년 간의 운동들이 복수의 일차적 완수 앞에서 간단히 지워질 때, 실은 세상은 변할 리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 그 누구도 이름 지워진 사건들에 대해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대체 우리는 무얼 위해 싸웠던 것일까. 나는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대체 책임자는 어디있나? 책임을 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 누구도 책임에 관련하지 않게 되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 새 그가 탄 차가 동부구치소 내부로 사라졌다. 그래도 기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몸 속 깊이 응어리진 분이 나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