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임박한 이른 여름 앞에서: 몇 가지 메모

대충사는 이야기 2018. 5. 5. 22:12

0.


얼마 전 내가 제작자로 참여한 한 영화가 칸 영화제 모 부문 본선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기쁜 일이고 놀랄만한 경사지만 환영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전자는 나와 함께 영화를 만든 팀원들의 개인적 사정에 대한 말이고, 후자는 이 영화의 질과 그에 대한 수용 방식, 더 나아가 '영화제 프리미엄'의 양태에 대한 말이다.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는 데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내가 적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후자이다. 물론 명색이 제작자라는 이가 할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으나, 작은 조기 가시가 목구멍 깊숙이에 걸려 한참 동안 켁켁거려도 빠지지 않는 듯한 답답함과 짜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국내의 '암청색' 영화에 대한 해외 영화계의 선호는 (어느 정도 영화계의 경계선에 발앞꿈치를 아슬아슬하게 대고 있는) 나로선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단편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세이프>도 그렇지만, 칸 영화제 혹은 해외 영화제가 상영작 선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홍상수를 제외한) 한국 독립영화에 부여(하는 걸 넘어 요구)하는 예술산업적 구실의 색이란 폐쇄적이고 암울하며 폭력과 범죄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만들어지는 '암청색'인 게다. 영화제들이 종종 섹스와 폭력이 과잉으로 점철된 영화들에 환장한다는 걸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리 나쁜 상황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 '암청색' 이외의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걸리는 걸 상상하는 게 너무도 어렵다는 걸 떠올린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해외 영화제는 물론이고 국내 상업영화든 독립 영화든 이런 '암청색'이 판치는 것을 보며 짜증이 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다. 이는 '암청색' 영화에 대한 감정인 동시에 '암청색' 영화의 범람을 가능케 한 구조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다. 개별 작품의 질 보다는 이러한 범주에 얼마나 어울리냐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에 '국가영화'라는 말은 새로운 말로 재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영화'란 더 이상 내부적으로 시간을 들여 형성되어 후천적으로 명명되는 작품군이 아닌, 필름마켓을 오가는 세일즈 에이전트들의 (미리 정해져있는) '혜안'에 의해 선별될 것을 염두에 두어 내외적으로 형성되는 작품군이 되었으며 -물론 이 분류가 얼마나 거칠며 오류가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 이 영화는 작금의 영화제 시스템에선 이러한 예술산업적 구실로서의 '국가영화' 바깥에 대한 호응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해버렸다. 


16.


다음은 올해 들어서 읽기 시작한 것 중 지금까지 완독한 책들이다. 각각 [죽음의 엘레지], [너무 움직이지 마라], [을의 민주주의], [금과 화폐의 역사], [원시적 열정],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 사상사], [통일성과 파편성: 프루스트와 문학 장르], [벌거벗은 해], [미술관이라는 환상], [건담과 일본], [헤겔 또는 스피노자], [13인당 이야기](아마도 분량 대비로 가장 빨리 읽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프랑스인], [현대미술 글쓰기], [돈가스의 탄생]으로, 이 중 진태원 선생의 [을의 민주주의]는 가장 별로였다. 혹은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 초우의 [The Age of the World Target]을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아주 좋다. 비서구와 서구의 지적 권력 차이에 대한 (지금껏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16.1.


[을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떠올리면서 종종 하게되는 불평으로 가지가 뻗쳐나가다. 한국의 지적 풍토는 기초를 다루는 데서도 이렇게 부족한 지점이 생기는 걸? 한국에서 나오는 이론 서적들을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점점 더 요즘 더욱 생생히 느끼는데, 물론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며 번역의 유구한 욕망과 역사 운운하는 것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깊이 파고들려는' 태도 대신 표면에 있는 징후들을 잇질문을 제기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한국에도 독자성을 보인 이론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n차 연구에 적힌 서술을 흡수 및 적용하는 것 이상의 수준까지 나아가진 못하며 -예컨대 나는 홍범기가 이런 부류로서 거품 낀 지식인이라 본다- , 아주 소수의 인상적인 연구 역시 소수적-'급진적'인 독해를 표방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전제를 견지해 그것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의 'Radical'한 독자성을 보이는 이는 완전히 드물다. 예컨대 올해가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임에도 불구, 국내 영화이론계는 이에 완전히 무지했으며 관련 컨퍼런스가 열릴 기미도 전혀 없다. 


53.


친구와 한참 시시껄렁한 카톡을 주고받다 허문영이 FILO에 실린 <더 포스트> 비평의 첫 장에서 장인적 영화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는,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듣고야 말았고 거기에 절로 짜증이 솟구쳐 트위터에 이에 관해 조금 썼으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분이 죽지 않아 다시 쓰려 한다. 물론 허문영이 말하는 장인적 영화 자체가 작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당연히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는 할리우드의 '장인'들이 아니고서야 만들 수 없는 영화이다- 또 장인 없이 '예술가'들만 가득한 판을 상상하는 건 (당대의 그 어떤 '대중예술'에 있어서든) 불가능하지만, 집단적으로 장인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배분하고 그 안에서 장르영화의 범주를 다양하게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던 창조적 스튜디오 시스템이랄 게 어느 국가의 촬영소에서든 애진작에 붕괴하고 안전/친절우선주의가 판을 채운 지 오래인 작금에 어느 개별적인 영화 혹은 작가를 두고 비평의 영역에서 '장인들의 조화로운 기예가 미덕이다'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시대에 이미 고전적인 '장인'이란 예술가와 동일한 위상의 작업 방식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장인을 장인이라고 하기 위해선 먼저 장인들을 위한 시스템의 기반이 필요하나, 작금엔 아주 소수만이, 그것도 스튜디오의 주선이 아닌 자발적 협업을 통해 그렇게 작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멜파소 프로덕션을 떠올려보자. 대체 멜파소 프로덕션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 헨리 범스테드같은 이를 사망 직전까지 영화 현장에 고용하고 대접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스트우드가 직접 작곡한 (효과적인 감정선의) 음악들을 영화에 삽입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스트우드가 영화의 배우겸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로서 영화를 둘러싼 모든 사안을 전두지휘할 수 있기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지 않은가? 투르뇌르나 월쉬나 나루세가 촬영소의 '일개'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던 시대, 스튜디오 자체가 하나의 개성이고 미학이던 시대, 그런 집단적 기예가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는 끝났고 이젠 전혀 '장인적'이지 못할 환경이 주어졌는데, 그 속에서도 굳이 장인성의 영화를 주장하는 비평가의 행위란 결과적으로 '정통성'의 이데올로기를 파생상품으로 십분 활용하는 시장의 논리("원조 할머니가 직접 만든 양념장~")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꼴에 다름 아니리란 말이다(물론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했듯 작가주의 역시 이런 측면에서 시장논리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지만).

 

11.16.


최근에 발매된 미고스나 카디 비의 신작들을 들으면서, 당대의 음악을 멜로디나 프로덕션의 구성을 통해 논하는 게 확실히 불가능해지고 있다 느낀다. 애초에 비평이 지금껏 '소리가 잘 짜였네요' 수준에 머문 게 잘못이지만. 특히 미고스는 힙합에 있어 이 흐름을 새롭게 선도하는 것 같다. 


3. 


최근 몇 주 사이에 본 최신 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김응수의 두 편의 세월호 에세이(<오, 사랑>, <초현실>)와 코고나다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콜럼버스>였다. 물론 친구들이 "드니 안 좋아하는 너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거다"고 한 <내면의 아름다운 태양>과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지에 오른것만 같은 홍상수의 새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는 몸이 안 좋아 아직 안 보았고, 드디어 만난 뒤몽의 짜릿한 교훈극 <마 루트> -이 영화는 정말 이렇게 불려야한다!-는 그래도 2016년의 영화니 제외했다 치더라도, 이 작품들의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은 결코 바래지 않는다. 김응수는 (한 번은 강요된, 다른 한 번은 필연적인) 미메시스의 부재, 혹은 김응수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곤궁함" 속에서 그 부재가 지시하는 현실의 부재를 필사적으로 건드리고 인식하려하는데, 그러면서 숭고함과 윤리성의 페티시즘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순진해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비워내고 서로 미끄러트리는 것에 집중하는 그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시 국내의 '이 방면'에선 김응수만한 이가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차라리 김응수가 이미지를 건드릴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비로소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 우리에게 던져진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예컨대 <오, 사랑>에서 작은 항구에 모여있는 수 많은 사물들이 격렬하게 떨리는 순간처럼. 한 편 코고나다의 <콜럼버스>는 건축물들과 우거진 초록의 '완벽한' 조형적 대칭을 타고 흐르는 인물들의 말과 제스쳐가 무척 감탄스러웠다. 빗겨나가는 말들의 앙상블, 곧 영화와 건축의 유사성.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 원래 존 조를 기대하고 본 영화였으나, 정작 내가 러닝타임 내내 홀린 상대는 헤일리 루 리차드슨이었다. 물론 이 말은 리차드슨의 캐릭터에 매혹되었다는 게 아니라, 캐릭터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리차드슨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종종 깜빡이듯 드러나는 순간에 매혹되었다는 말이다. <17살의 끝자락>에서 보여준 스타적 가능성보다 훨씬 나아간 그 미소는, 분명히 매우 귀중한 이미지다.


18.


여행-성장-재회의 플롯이란 (프랑코 모레티가 빅데이터 연구로 증명했듯) 근대 이후 완전히 낡아 이젠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범용해진 극작술이긴 하지만, 나에겐 극 속에서 재회가 정말 재회로 완수되는 순간이 그 범용함 이상으로 기분 나쁜 잉여로 다가온다. 차라리 무섭다고 할까, 정말 달라진 '나'가 다시 만난 '너'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역은 또 어떠한가라는 의문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재회의 완수가 가능한 플롯에서의 '너'란 '나'와는 다른 타자가 아닌, 기껏해야 '나'의 과거라는 지표에서 끌어올린 '윤리적 성찰'에의 객체에 불과할 터. 그렇게 된다면 '너'와의 '사랑'은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고 그 간극을 그냥 간극이라고, 범접불가능한 영역이라고 선언해버리는 것도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감상적으로 정체화해버리는 점에서 짜증나는 태도다. <카드캡터 사쿠라: 클리어 카드>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는 심리에는 이런 재회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요즘의 일본 만화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아무리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라도.


256.


어쩌다보니 새 어벤저스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주말마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 영화의 정치학(을 가장한 '정파학') 따위의 케케묵은 논리는 이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앞에서 완전히 무용한 것이 된 듯 보인다. 이제 사람들의 안구를 집중시키고 극장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물량의 감각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와칸다의 전투 시퀀스는 그 점에서 그냥 간단히 시대착오적/인종혐오적이라 말하기 꺼려진다. 대평원에서의 육탄전만 영화 속 전쟁의 모든 것으로 여겨지며 첨단 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철저히 배제되는 -<블랙 팬서>에서 보았던 포탑과 전투기는 어디에 있는가? 와칸다 정도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지켜온 국가에 이 정도의 전술법밖에 없단 말인가?- 상황을 두고 토르의 막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블랙 팬서>의 설정을 모두 배반했다는 지적도 타당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를 지난 어벤저스 영화들의 클라이막스 전투의 연장선상에서(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개인과 개인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육탄전을 세세히 다루는 것만큼 사람들을 자극시킬 충격은 없다는 게다. 특히 그것이 영웅들이 처한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어벤저스 1에서 아이언맨이 뉴욕에의 핵폭탄 투하를 처절하게 저지한 것도, 어벤저스 2에서 쉴드의 공중전함이 일찍 나타나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소코비아를 폭파하거나 EMP를 투하하는 대신 뒤늦게 나타나 구조선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도 같은 목적 때문이 아닐까? 내러티브 상 심리적인 '노동'은 점점 더 간소화되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은 점점 더 광폭해지는 상황. 어쩌면 이는 할리우드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대작들을 제작해 자본 사이에 일종의 '중재'를 야기하(려)던 것과 중첩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더. 어째서 뉴욕의 절멸은 막을 여지가 있었지만 소코비아와 와칸다의 절멸은 필연적인가? 왜 전쟁의 무대는 대륙으로, 우주로 확장되며 정작 미국 본토는 벗어나는가? 미국의 책임을 논하려 한다면서 정작 미국이 (신적 폭력이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 드는가? 


27.


게임 비평을 하고 싶지만 나는 게임을 잘 못한다. 게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각-경험 체계를 어떻게 비판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이전에 게임을 잘 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게임을 잘 플레이하지 못한다면 게임 비평은 커녕 다른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것조차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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