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흐뭇하게 만끽하다 문득

대충사는 이야기 2018. 10. 6. 23:14

3.


<필름 소셜리즘> 1부 이래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 생산 기제와 방식들을 거칠기 짝이 없게 잇고 뒤섞어 시청각적 '난장'을 야기하는 -(앙드레 지드의 <희망>을 경유하는 <영화의 역사(들)>을 경유한)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지의 우정'의 디지털적 연장선일- 장 뤽 고다르의 방법론을 디지털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이미지들의 '연대', 곧 해체적 바로크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지털의 폭력이 야기한 '바로크적 난관'을 해체하기 위한 바로크. 지금 고다르가 적으로 삼은 '바로크적 난관'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텐데, 하나는 이음새라는 단어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실제 배우들과 가상의 미장센을 한데 매끈하게 섞어 무한한 스펙터클을 펼치는, 디지털화된 '신화적' 블록버스터들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파편들을 동일한 연속선상에 '산만하게', 허나 '흥미롭게' 배치하여 인간의 감각을 끊임없이 낚아채는 충격의 연쇄이다. 하지만 둘 모두 모든 것이 동일하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적 자율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문득 그가 <언어와의 작별>이 공개되었을 즈음의 인터뷰에서 SMS(Short Message Service)를 "내 영혼을 구해줘"(Save My Soul)라는 구조 신호로 읽은 게 생각난다. "연결된 소외"...) 이에 반하는 고다르의 바로크란 바로크하면 흔히 떠오르는 방식인 탈중심, 탈경계의 과잉에 그치지 않고서, 특정한 '제도'(자본? 혹은 영화?)의 구조적 모순 안에 갇혀있을 때 서로 상이한 '문제'들에 있어 그 상이함을 엄격하게 고수한 채 서로 관계시키면서 거기서 생겨나는 부조화의 노이즈를 이용, 구조적 모순의 원리를 외려 극대화해 '제도'에 내파시키는 극한의 수사법으로서의 '난장'이 된다. 요컨대 '제도'가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문제들의 계열을 불편하게 '덩어리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이미지 생산 기제가 능동적으로 범람하고 뒤섞이는 작금에 들어선 더더욱 심화되어 아예 양쪽 눈에 다른 상이 비치게 만들곤 하는 3D 영화 <언어와의 작별>에까지 이른 것이고. 바로 그런 점에서 고다르는 바리케이트 너머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비판자 내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 치밀한 '바보'이다. 어쩌면 고다르가 최근들어 '은유'를 더욱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디지털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고뇌의 결과일지도. 


2004.


'영상'에 있어 촬영도 보관도 상영도 모두 디지털로 행해지는 작금에 강한 반감을 갖고서 전적으로 역행하(려)는 필름 추종자들을 어리석다며 비판하는 이들이 그러한 필름 추종자들의 대표로 쿠엔틴 타란티노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호명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필립 가렐이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언급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필름의 힘'을 믿고서 최근까지(그리고 아마 가능한 앞으로도) 꾸준히 필름으로 작업해온 감독들이 아닌가? 물론 이런 비판은 대부분 '거대 사업'으로서의 영화 제작을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그 무의식에 달리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작가'에 대한 예우? 그들은 다르다는 직관? 


2004.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SNS가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아닐까. 전자는 후자로 인한 불안을 떨치기 위한 강박관념, 즉 SNS가 형성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의지'리란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광학적 미디어에 대한 (얼마 전 타계한) 폴 비릴리오의 말을 필두로 한 여러 미디어 연구자들의 말을 스치듯 떠올리는 중이지만, 당장 관심이 가는 것은 SNS라는 '공론장'을 이루는 말들이다(물론 키틀러가 말했듯 결국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있지만...). 그 파편적인 담론들. 아니, 담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파편들. 이제 우리는 '플로우'에 늦는다는 것을 거의 죄악처럼 생각하며, 죄악 없이 살기 위해 열심히 가능한 많은 사안을 퍼나르고 떠들며 개입하고 그렇게 자신의 임무가 끝난다고 생각해 재빨리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나 외부자로서 알 수 있는 것만을 따질 뿐, 모를 수도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행동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될 터이며 정말로 문제의 세부에 닿아 그것을 뒤흔들 수 있을지에 대해선 충분히 판단하지 못한다. (최근들어 자주 보이는 "근황"이라는 단어는 이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사건들은 스마트폰의 크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의 길이와 크기를 자꾸만 줄이고, 그래서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내리면 그 사건들은 외화면 따위 없이 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엄격한 의미에서의 담론은 빠르게 설 자리를 거의 잃어버리고 단발적이고 강렬한 말, 이미지, 감정의 향연이 영토를 불안정하게 지탱한다. 기사 링크를 퍼나르면서 정작 기사는 읽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연결망의 무한한 자율성이 알고자 하는 의지를 이름의 수집에의 의지로 전환해버린걸까. 여기서 아이러니 하나. SNS 안에서 서로 대적하곤 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디스패치, 인사이트류의 황색 언론은 어느 순간 기괴하게 마주서서 공명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심을 이용하각자의 '윤리'적 태도 -전자라면 비율 맞추기, 후자라면 알 권리에 대한 신봉 - 로 문제들의 구체적인 결을 쳐내고 제도를 향해 적극적으로 투항하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이라면 여기서 내가 누누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시리라. 작금에 자유나 개성은 구조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기제가 되었다.


96.


문학동네 「2018, 퀴어전사 ―前史·戰史·戰士」를 읽었다. 문학의 장 -물론 여기에만 머무는 건 절대 아니다- 안에서 퀴어는 구조 바깥에 존재한 채 구조에 맞서는 드라마틱한 투쟁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왔으나, 실은 이 투쟁이란 구조를 뒤흔드는 유효한 저항이 아니라 구조가 그들에게 허락한 유일한 재현 방식이었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 주장이다. (실제로 퀴어는 종종 '지성 시장'에서 반-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 쓰이곤 하지 않는가? 그것이 추상화든 구체화든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조에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김건형은 이를 일상이라고 '상상'한다. 투쟁적 주체가 구조가 형성한 재현의 틀을 작동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차라리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존재로서의 퀴어를 구성하는 것이 유효한 저항일 수도 있다는 게다. 개인적인 해석을 곁들이자면, 구조가 바라는 '보편'의 일상이나 세속과는 거리가 좀 있는, 그런데 그 "좀"이라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구조 안에서 쉽사리 분류하기 어렵고 나아가 같은 기표라 한들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하는, 그래서 판에 박힌 삶을 반복하면서 외려 삶을 해체하는 퀴어의 세속성에 그는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니네랑 똑같아'와 '우리는 니네랑 달라'의 회색지대를 양분으로 삼고자 한달까? 그런 점에서 본문의 어떤 논지들은 최근의 비판 이론을 퀴어 이론에 성실히 대입한 결과처럼 보이는데, 물론 그게 본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문학이라는 영토 안에서 이를 열심히 '핥아보려' 한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22.


대머리(민두라고 쓰긴 뭐하다...)는 언제부터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신화적인 스타일-기호가 되었을까? 장발의 신화는 조금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그 자리를 대머리가 채우고 있는 흐름의 세부가 궁금하다. 이 세부를 파헤치다보면 이 시대에 신화로서의 '예술가'가 무엇이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가령, 점점 더 '셀렙'에 가까워지는 예술가들은 이것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간단 말이지. 좀 억울하다. 



19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주의가 점점 더 판을 치는 것 같다. 가족도 가부장제도 국가도 민족도 주체도 젠더도 인간도 그냥 부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뇌수가 흘러내리는 것 마냥 어지럽다. 그러한 개념들이 아무리 공공의 적이라고 해도 수 많은 레이어가 역사의 두께와 개인의 사정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심지어는 모순적으로까지 엮인 비대한 구조인데, 이를 그저 하나의 레이어, 곧 환상으로 생각하여 자유(라는 이름의 환상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다니! 예를 들어, 다들 '공동체란 실은 실체 없는 허상'이라고 말하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을 들먹이긴 하나, 정작 그가 정말로 마주한 난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를 읽지 않고 요약문들만 열심히 탐독한 게 아닐까?)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암암리에 강조하는 진짜 주제는 이것이다; 만약 민족이 정말 '상상의 공동체'이기만 하다면, 어째서 수백년 간 수 많은 이들이 민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걸었단 말인가? 우리는 죽음도 불사한 그들을, 그 실재를 단순히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거부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이 푸코의 '담론'과 교묘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틀을 만들어내는 규범으로서의 개념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실재성을 지녔는지 자문해야 한다. 


923.


김영민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를 둘러싼 말들에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조잡한 논리를 비장하게 내세울 수 있지? 그래, 나 역시 이 칼럼이 기득권 남성 지식인이라는 필자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좀 진부해지고 나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근거로 이런 류의 '유희적 거부' 자체를 비난하는 건 결국 '모든 저항은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참여여야 한다'는, 가장 무시무시한 엘리트 계몽주의로 달려나가는 게 아닌가? 이러한 반응을 대표하는 게 바로 채효정의 페이스북 글이다. "이토록 '인간'에 있어 진중하고 근원적인 형식을 이따위로 가볍게 쓰다니! 이건 조롱이고 냉소고 죄악이야!"라고 쓴다한들 요약이 안 되진 않을 이 형편없는 생각이 좋아요를 천번 넘게 받았다는 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실없이 웃게 하는 말이 그 웃음으로 인해 '고무'라고 불리는 나름의 실천성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신문 칼럼란은 개인 SNS나 에세이와는 다르다고? 사실상 내용이랄 게 없다고? 이 칼럼이 오히려 그것을 노렸다는 걸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도 정녕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진지함을 미끄러트리는 우둔한 농담을 스스로에게도 던짐으로서 축적된 글 전체를 뒤흔들어 글을 둘러싼 담론(칼럼이라는 지면, 현실에 우회적으로 개입하는 '글')을 환기하는 것이 이 칼럼의 본의이지 않은가. 장정일조차 이 정도로 칼럼이라는 지면-평면을 유희적으로 뒤흔든 적은 없다. 내가 이 칼럼을 옹호하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런 류의 '실없는' 글은 좀 더 많이 쓰일 필요가 있다.


08.


여기저기서 올해 창비 신인소설상 당선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을 열심히 상찬하는 걸 보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박근혜 이후'에 넘쳐흐르던 자조인 "현실이 픽션 이상으로 픽션" 내지는 "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온다"가 작가들을 실제로 긴장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의 문학적 유행을 풍자로 움직였다는 것은 자명해보인다. 물론 이 때의 풍자는 이전의 풍자와 같지 않다. 지나치게 기괴한 현실을 거의 고스란히 극화함으로서 그 결과물을 '하이퍼 리얼리즘'과 '슈르 리얼리즘' 사이에서 진동시키려는 -혹자는 이를 "환장문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역설이 이 작품의 전략으로서의 풍자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류진은 현실의 기괴함을 놓치고 매마른 풍자에 그치는 여타의 구시대적 풍자극들보다야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으리라. 허나 나는 이 작품이 지나치게 동시대적인 게 아닌가 우려된다. 동시대적이라 우려된다니? 그 감성의 나름대로의 유효함과는 별개로, 당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걸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 결국 그러한 감성들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려)는 작품에 그치고 마리란 얘기다. 좀 더 짓궂게 말하자면, 내게 이 작품은 '썰'의 '기성문학적' 형태로까지 보인다. 나는 카프카의 다짐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를 아직 잊지 않았다.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문학 작품'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문득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난다). 그런데 창비 소설부문 심사위원들은 '소확행' 따위의 말을 언급하며 이 작품에 상을 줬다. 말이 되는 일이야 대체 이게?


944.


영화나 게임 비평같은 건 남들이 알아서 열심히 번역하(려고 하)니까 만화 비평을 번역해볼까 하는 생각을 말 그대로 생각만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국내에서 만화 비평을 하겠다던 시도들은 무엇보다 담론 소개에 있어 큰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가령, 앙굴렘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아쏘시아시옹은? 하물며 <피너츠>나 <땡땡의 모험>이나 <캘빈과 홉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한국어로 읽은 적이 있었나? 일본 시장이 번역에 열을 내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이 척박한 지형에서 '우리들'만으로 바로 시작하려는 건 느린 자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어떤 비평적 태도가 결여되어있다는 것도 문제다. 한 플랫폼에서 (좀 거칠게 분류하자면) 누구는 미학적, 누구는 사회적, 누구는 장르적, 누구는 산업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전문 영역에 의한 분업은 분명 필요하다. 허나 '비평 플랫폼'이라면 분업중인 필진들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만화관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 어느 플랫폼에서도 우리가 '만화'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공통된 고민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지금 이 판이 어떤데 그런 걸 요구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편집진은 글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하는 상황이니. 그래도 정말 거기서 만족하고 싶은가. 그럴 수 있는가...


4.


네이버의 '컷툰'과 <며느라기>의 수신지 같은 작가(들)의 '인스타툰'은 어떻게 다를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별 컷에 댓글을 달거나 SNS에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내는 만화의 변화된 속성은 무엇일까? 인쇄 만화들은 최소 단위인 칸을 아예 지우거나 대체하는 식으로 페이지라는 평면/단위를 자율적 -물론 여기서의 "자율적"이란 좀 엄격하게 쓰여야 한다- 으로 쓰고 확장하는 반면 웹툰들은 하나의 칸으로 스스로를 축소해 단순화하며 인쇄 만화에서라면 가능할 자율성을 억제하는 추세는 이상하게 보인다. 하나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다른 하나의 자율성을 잃는다는 대가를 치르는 것일까?


13.


집에서 제일 가까워 자주 찾던 동네 단골 만화방이 몇 개월 전에 문을 닫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 크나큰 실망감을 안고서 요즘은 조금 멀리 떨어진 만화방을 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엔 웬만한 만화방에선 결코 없을 만화들이 잔뜩 있어서 들릴 때마다 실망감을 자연스레 잊고 그저 기쁘게 놀라게 된다. <왕가의 문장>이나 <포의 일족>, <GOGO 몬스터>부터 <블랙홀>, <에식스 카운티> 그리고 테즈카 오사무의 여러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내가 보길 원하는 작품들을 보기 위해 굳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서 한참 멀리 떨어진 만화카페에 갈 필요 없이 여기까지 조금만 걸어와도 상관 없어진 게다. 그 덕에 테즈카 오사무에 대한 (한동안 잠잠하던) 열정이 그야말로 샘솟고 있다. 그 열정 속에서 떠오른 질문 하나. 어째서 테즈카 오사무의 주인공들은 티마고 아톰이고 블랙 잭이고 칠색 잉꼬고 베토벤이고 할 것 없이 누군가의 대리거나 누군가의 조합으로서, 즉 누구를 대신해서 살아가는 '순수하지 못한' 존재들일까?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두 세계 사이에서 고독한 방황을 지속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는 영화나 연극 등의 예술에 대한 (만화가로서의) 테즈카의 광기어린 집착과 공명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러한 테즈카의 특성을, 회화와 문학과 영화 사이에서 '진지한'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밀려난 만화의 위치를 어떻게든 재고하기위하여 만화가 그러한 '진지한' 예술들을 끌어들이고도 버틸 수 있는지 탐색하려는 영웅적 사고의 형상적 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진 가설도 안 되는 생각일 뿐이지만...


145.


최근 한국 TV 예능 중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유일하게 즐겨보고 있다. 한국 요식업 시장을 둘러싼 담론들을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은근히 폭로한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진진한데, 가령 대전 청년구단을 '솔루션'의 무대로 만들 때, 업자 개개인 혹은 업자들이 공유하는 의식 문제처럼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미시적 사안은 물론이고(여기서 멈춘다면 이 프로그램은 보수 프로파간다로 이용될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야기하고 전시 행정에만 주력하는 지방자치단체나 이걸 가능케 한 '청년 담론'처럼 간접적으로 다뤄지는 거시적 사안들을 표면 위에 은근히 노출시키며 문제의 복합성을 복합적으로 환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오쓰카 에이지가 지브리의 작품들에 대해 한 말을 빌리자면) '수용자의 윤리성'에 문제를 맡기는 것. 실제로 방영 직후에 청년구단 계획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촛불 혁명'을 겪어버린 우리에게 변화를 위한 선동이란 오직 이런 식으로만 가능한 게 아닐까? 


0-2.


이 메모들로 티스토리 업로드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 이후엔 https://brunch.co.kr/@jesaluemary047 를 통하여 글을 쓴다. 몇몇 글은 여기에 남겨둘 터이고 몇몇은 수정을 거친 후에 브런치로 옮길 것이나 대부분은 지울 것이다. 당신이 지금 확인할 수 있듯이!




거의 임박한 이른 여름 앞에서: 몇 가지 메모

대충사는 이야기 2018. 5. 5. 22:12

0.


얼마 전 내가 제작자로 참여한 한 영화가 칸 영화제 모 부문 본선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기쁜 일이고 놀랄만한 경사지만 환영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전자는 나와 함께 영화를 만든 팀원들의 개인적 사정에 대한 말이고, 후자는 이 영화의 질과 그에 대한 수용 방식, 더 나아가 '영화제 프리미엄'의 양태에 대한 말이다.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는 데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내가 적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후자이다. 물론 명색이 제작자라는 이가 할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으나, 작은 조기 가시가 목구멍 깊숙이에 걸려 한참 동안 켁켁거려도 빠지지 않는 듯한 답답함과 짜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국내의 '암청색' 영화에 대한 해외 영화계의 선호는 (어느 정도 영화계의 경계선에 발앞꿈치를 아슬아슬하게 대고 있는) 나로선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단편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세이프>도 그렇지만, 칸 영화제 혹은 해외 영화제가 상영작 선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홍상수를 제외한) 한국 독립영화에 부여(하는 걸 넘어 요구)하는 예술산업적 구실의 색이란 폐쇄적이고 암울하며 폭력과 범죄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만들어지는 '암청색'인 게다. 영화제들이 종종 섹스와 폭력이 과잉으로 점철된 영화들에 환장한다는 걸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리 나쁜 상황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 '암청색' 이외의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걸리는 걸 상상하는 게 너무도 어렵다는 걸 떠올린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해외 영화제는 물론이고 국내 상업영화든 독립 영화든 이런 '암청색'이 판치는 것을 보며 짜증이 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다. 이는 '암청색' 영화에 대한 감정인 동시에 '암청색' 영화의 범람을 가능케 한 구조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다. 개별 작품의 질 보다는 이러한 범주에 얼마나 어울리냐가 더 중요해진 오늘날에 '국가영화'라는 말은 새로운 말로 재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영화'란 더 이상 내부적으로 시간을 들여 형성되어 후천적으로 명명되는 작품군이 아닌, 필름마켓을 오가는 세일즈 에이전트들의 (미리 정해져있는) '혜안'에 의해 선별될 것을 염두에 두어 내외적으로 형성되는 작품군이 되었으며 -물론 이 분류가 얼마나 거칠며 오류가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 이 영화는 작금의 영화제 시스템에선 이러한 예술산업적 구실로서의 '국가영화' 바깥에 대한 호응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해버렸다. 


16.


다음은 올해 들어서 읽기 시작한 것 중 지금까지 완독한 책들이다. 각각 [죽음의 엘레지], [너무 움직이지 마라], [을의 민주주의], [금과 화폐의 역사], [원시적 열정], [낯선 사람들과의 불화],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 사상사], [통일성과 파편성: 프루스트와 문학 장르], [벌거벗은 해], [미술관이라는 환상], [건담과 일본], [헤겔 또는 스피노자], [13인당 이야기](아마도 분량 대비로 가장 빨리 읽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프랑스인], [현대미술 글쓰기], [돈가스의 탄생]으로, 이 중 진태원 선생의 [을의 민주주의]는 가장 별로였다. 혹은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 초우의 [The Age of the World Target]을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아주 좋다. 비서구와 서구의 지적 권력 차이에 대한 (지금껏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16.1.


[을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떠올리면서 종종 하게되는 불평으로 가지가 뻗쳐나가다. 한국의 지적 풍토는 기초를 다루는 데서도 이렇게 부족한 지점이 생기는 걸? 한국에서 나오는 이론 서적들을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점점 더 요즘 더욱 생생히 느끼는데, 물론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며 번역의 유구한 욕망과 역사 운운하는 것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깊이 파고들려는' 태도 대신 표면에 있는 징후들을 잇질문을 제기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한국에도 독자성을 보인 이론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n차 연구에 적힌 서술을 흡수 및 적용하는 것 이상의 수준까지 나아가진 못하며 -예컨대 나는 홍범기가 이런 부류로서 거품 낀 지식인이라 본다- , 아주 소수의 인상적인 연구 역시 소수적-'급진적'인 독해를 표방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전제를 견지해 그것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의 'Radical'한 독자성을 보이는 이는 완전히 드물다. 예컨대 올해가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임에도 불구, 국내 영화이론계는 이에 완전히 무지했으며 관련 컨퍼런스가 열릴 기미도 전혀 없다. 


53.


친구와 한참 시시껄렁한 카톡을 주고받다 허문영이 FILO에 실린 <더 포스트> 비평의 첫 장에서 장인적 영화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는,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듣고야 말았고 거기에 절로 짜증이 솟구쳐 트위터에 이에 관해 조금 썼으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분이 죽지 않아 다시 쓰려 한다. 물론 허문영이 말하는 장인적 영화 자체가 작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당연히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는 할리우드의 '장인'들이 아니고서야 만들 수 없는 영화이다- 또 장인 없이 '예술가'들만 가득한 판을 상상하는 건 (당대의 그 어떤 '대중예술'에 있어서든) 불가능하지만, 집단적으로 장인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일거리를 배분하고 그 안에서 장르영화의 범주를 다양하게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던 창조적 스튜디오 시스템이랄 게 어느 국가의 촬영소에서든 애진작에 붕괴하고 안전/친절우선주의가 판을 채운 지 오래인 작금에 어느 개별적인 영화 혹은 작가를 두고 비평의 영역에서 '장인들의 조화로운 기예가 미덕이다'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시대에 이미 고전적인 '장인'이란 예술가와 동일한 위상의 작업 방식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장인을 장인이라고 하기 위해선 먼저 장인들을 위한 시스템의 기반이 필요하나, 작금엔 아주 소수만이, 그것도 스튜디오의 주선이 아닌 자발적 협업을 통해 그렇게 작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멜파소 프로덕션을 떠올려보자. 대체 멜파소 프로덕션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 헨리 범스테드같은 이를 사망 직전까지 영화 현장에 고용하고 대접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스트우드가 직접 작곡한 (효과적인 감정선의) 음악들을 영화에 삽입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스트우드가 영화의 배우겸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로서 영화를 둘러싼 모든 사안을 전두지휘할 수 있기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지 않은가? 투르뇌르나 월쉬나 나루세가 촬영소의 '일개'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던 시대, 스튜디오 자체가 하나의 개성이고 미학이던 시대, 그런 집단적 기예가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는 끝났고 이젠 전혀 '장인적'이지 못할 환경이 주어졌는데, 그 속에서도 굳이 장인성의 영화를 주장하는 비평가의 행위란 결과적으로 '정통성'의 이데올로기를 파생상품으로 십분 활용하는 시장의 논리("원조 할머니가 직접 만든 양념장~")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꼴에 다름 아니리란 말이다(물론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했듯 작가주의 역시 이런 측면에서 시장논리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지만).

 

11.16.


최근에 발매된 미고스나 카디 비의 신작들을 들으면서, 당대의 음악을 멜로디나 프로덕션의 구성을 통해 논하는 게 확실히 불가능해지고 있다 느낀다. 애초에 비평이 지금껏 '소리가 잘 짜였네요' 수준에 머문 게 잘못이지만. 특히 미고스는 힙합에 있어 이 흐름을 새롭게 선도하는 것 같다. 


3. 


최근 몇 주 사이에 본 최신 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김응수의 두 편의 세월호 에세이(<오, 사랑>, <초현실>)와 코고나다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콜럼버스>였다. 물론 친구들이 "드니 안 좋아하는 너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거다"고 한 <내면의 아름다운 태양>과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지에 오른것만 같은 홍상수의 새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는 몸이 안 좋아 아직 안 보았고, 드디어 만난 뒤몽의 짜릿한 교훈극 <마 루트> -이 영화는 정말 이렇게 불려야한다!-는 그래도 2016년의 영화니 제외했다 치더라도, 이 작품들의 가슴 저리는 아름다움은 결코 바래지 않는다. 김응수는 (한 번은 강요된, 다른 한 번은 필연적인) 미메시스의 부재, 혹은 김응수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곤궁함" 속에서 그 부재가 지시하는 현실의 부재를 필사적으로 건드리고 인식하려하는데, 그러면서 숭고함과 윤리성의 페티시즘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순진해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비워내고 서로 미끄러트리는 것에 집중하는 그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시 국내의 '이 방면'에선 김응수만한 이가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차라리 김응수가 이미지를 건드릴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비로소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 우리에게 던져진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예컨대 <오, 사랑>에서 작은 항구에 모여있는 수 많은 사물들이 격렬하게 떨리는 순간처럼. 한 편 코고나다의 <콜럼버스>는 건축물들과 우거진 초록의 '완벽한' 조형적 대칭을 타고 흐르는 인물들의 말과 제스쳐가 무척 감탄스러웠다. 빗겨나가는 말들의 앙상블, 곧 영화와 건축의 유사성.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 원래 존 조를 기대하고 본 영화였으나, 정작 내가 러닝타임 내내 홀린 상대는 헤일리 루 리차드슨이었다. 물론 이 말은 리차드슨의 캐릭터에 매혹되었다는 게 아니라, 캐릭터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리차드슨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종종 깜빡이듯 드러나는 순간에 매혹되었다는 말이다. <17살의 끝자락>에서 보여준 스타적 가능성보다 훨씬 나아간 그 미소는, 분명히 매우 귀중한 이미지다.


18.


여행-성장-재회의 플롯이란 (프랑코 모레티가 빅데이터 연구로 증명했듯) 근대 이후 완전히 낡아 이젠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범용해진 극작술이긴 하지만, 나에겐 극 속에서 재회가 정말 재회로 완수되는 순간이 그 범용함 이상으로 기분 나쁜 잉여로 다가온다. 차라리 무섭다고 할까, 정말 달라진 '나'가 다시 만난 '너'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역은 또 어떠한가라는 의문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재회의 완수가 가능한 플롯에서의 '너'란 '나'와는 다른 타자가 아닌, 기껏해야 '나'의 과거라는 지표에서 끌어올린 '윤리적 성찰'에의 객체에 불과할 터. 그렇게 된다면 '너'와의 '사랑'은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렇다고 그 간극을 그냥 간극이라고, 범접불가능한 영역이라고 선언해버리는 것도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을 감상적으로 정체화해버리는 점에서 짜증나는 태도다. <카드캡터 사쿠라: 클리어 카드>를 도저히 보지 못하겠는 심리에는 이런 재회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요즘의 일본 만화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아무리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라도.


256.


어쩌다보니 새 어벤저스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주말마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 영화의 정치학(을 가장한 '정파학') 따위의 케케묵은 논리는 이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앞에서 완전히 무용한 것이 된 듯 보인다. 이제 사람들의 안구를 집중시키고 극장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물량의 감각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와칸다의 전투 시퀀스는 그 점에서 그냥 간단히 시대착오적/인종혐오적이라 말하기 꺼려진다. 대평원에서의 육탄전만 영화 속 전쟁의 모든 것으로 여겨지며 첨단 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철저히 배제되는 -<블랙 팬서>에서 보았던 포탑과 전투기는 어디에 있는가? 와칸다 정도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지켜온 국가에 이 정도의 전술법밖에 없단 말인가?- 상황을 두고 토르의 막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블랙 팬서>의 설정을 모두 배반했다는 지적도 타당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이를 지난 어벤저스 영화들의 클라이막스 전투의 연장선상에서(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개인과 개인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육탄전을 세세히 다루는 것만큼 사람들을 자극시킬 충격은 없다는 게다. 특히 그것이 영웅들이 처한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어벤저스 1에서 아이언맨이 뉴욕에의 핵폭탄 투하를 처절하게 저지한 것도, 어벤저스 2에서 쉴드의 공중전함이 일찍 나타나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소코비아를 폭파하거나 EMP를 투하하는 대신 뒤늦게 나타나 구조선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도 같은 목적 때문이 아닐까? 내러티브 상 심리적인 '노동'은 점점 더 간소화되는 동시에 육체적인 '노동'은 점점 더 광폭해지는 상황. 어쩌면 이는 할리우드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대작들을 제작해 자본 사이에 일종의 '중재'를 야기하(려)던 것과 중첩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더. 어째서 뉴욕의 절멸은 막을 여지가 있었지만 소코비아와 와칸다의 절멸은 필연적인가? 왜 전쟁의 무대는 대륙으로, 우주로 확장되며 정작 미국 본토는 벗어나는가? 미국의 책임을 논하려 한다면서 정작 미국이 (신적 폭력이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 드는가? 


27.


게임 비평을 하고 싶지만 나는 게임을 잘 못한다. 게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각-경험 체계를 어떻게 비판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이전에 게임을 잘 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게임을 잘 플레이하지 못한다면 게임 비평은 커녕 다른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것조차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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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취당한 말들: 4/16

대충사는 이야기 2018. 4. 21. 01:30


그러니까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이미 세상에 있던 것을 어떤 상황에 맞추어 재조직할 때, 그 말은 설명되지 않던 실재를 설명할 수 있게 하면서 기존에 우리를 가두던 우리를 자각하고 그 바깥의 영토를 겨우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말의 체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말을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부정적인 말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든 이는 동일하다 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더 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다. 예컨대 '아재'라는 말이 사용되는 양상을 들여다보자. 본래 '아재'란 중장년 남성을 칭하는 말인 '아저씨'의 낮춤말로서 이들의 우스꽝스런 추태를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한 지칭대명사로 인터넷상에서 사용되었으나 어느 새 '아저씨'들이 스스로를 여전히 재치있고 흥미롭고 '젊은' 층으로 꾸미기 위해 쓰는 지칭대명사가 되어버렸고, 아재 온라인, 롯데리아의 아재버거, 김수박의 <아재라서> 같은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본래 '아재'를 풍자의 목적으로 사용하던 이들은 이전에 '아재'라 부르던 층을 지칭하기 위해 '개저씨'라는, 좀 더 직접적인 욕설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보다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한 둘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 및 지향성을 타인에게 밝히는 것을 이르는 말인 '커밍아웃'은, 예컨대 '덕밍아웃'같은 파생어들에 의해 본래의 이데올로기를 희석당한 채 기껏해야 '숨기던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곤 하며, 강간 문화의 폐혜를 비판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운동을 지칭하는 말인 '미투'는 '미투 가해자(혹은 피해자)' 따위의 기사 제목이나 대화, 혹은 '미투'를 이용한 캐치프레이즈의 범람 속에서 오히려 운동의 쟁점인 성폭력과 성폭력을 가능케 한 강간 문화의 힘을 담론장에서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 말들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전혀 반대의 의미로 (오)작동되고 있는 현상은 이전에 말이 지배세력에 의해 (오)작동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이래로 '노동자' 대신 '근로자'가 표준어로 지정되어 주로 쓰인 것은 자본이 말의 이데올로기-논리를 은폐하고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이데올로기-논리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즉 논리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싸움. 


그러나 현재에 이는 말의 홍수 속에서 말의 실재감과 실재의 폭력을 표백하고 일말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회가 나름 용인할 수 있는 '안전한' 수준으로 말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적극적으로 재전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 때 소수자들이 (폭력을 무화하기 위해) 취했던 말의 재전유 전략이 역으로 지배세력에 의해 (논리를 무화하도록) 쓰이는 것. 즉 논리 자체를 극단적으로 범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오늘날 말이 비정치적으로 정치화되는 방식이다. 이제 지배세력에겐 말을 은폐할 필요조차 사라진 게다. 앞서 말했듯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어떻게든 탈취되어 무기로서의 능력을 상실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무기가 더 남아있을 수 있나


눈에 걸핏하면 치이던 '헬조선', '세월호 이후' 등의 말들을 언제부터인가(라곤 하나 실은 정권 교체 이후부터) 신문 기사나 문학 잡지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어쩌면 이 방식의 한 결과가 아닐까? 정권 교체를 제외하고는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이루는 대부분의 주요 사안들 제대로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은밀하게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 정권 교체 직후 이 말이 갑작스레 시야에서 지워진 것을 보며 나는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따지는 게 벌써 낡아버렸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유한국당? 조선일보? 허나 삶의 도처에 있는 폭력을 지시하기 위해 창출된 말이 언론과 지식인들이 내걸던 어떤 정의에 의해 외려 남용되고 그 정의의 적당한 유효기한이 끝나자마자 버려질 때, 그래서 말의 실재감이 기껏해야 거품 낀 유행어의 그것 수준으로 추락한 듯 보일 때,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을 막고 말의 자리를 따져야 할 이들이 역으로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에 일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한다. 말을 탈취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지배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의에 도취된 '선인'들이기도 한 것이다.

책임자는 어디있나?: 3/22

대충사는 이야기 2018. 3. 29. 01:46


처음에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통쾌하고 유쾌하여 한 번 더 웃었다. 생중계되던 그의 집앞 상황을 보면서는 흐뭇함이 넘쳐흘렀다. 한 손은 리모콘을 들고서 생중계의 다양한 판본들을 훑느라 바빴고, 다른 한 손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이 소식을 전하고 기쁨을 공유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그가 서둘러 탄 검찰 호송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몸 속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심히 거슬리는 게 느껴졌다. 까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컥거리기도 하는 것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역한 신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만연하던 통쾌함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죽고 답답함이 이를 대신해, 빠르게 움직이던 양손은 단말기들 앞에서 초조하게 머뭇머뭇거렸다. 답답함? 그렇다. 물론 10년 전의 한 줄기 물대포로 나의 청소년기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명박의 구속에 기쁨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기쁠 수도 없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이젠 이명박마저 구속됐다. 물론 세상은 아주 조금 바뀌었으며 또 바뀌고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이명박은 뇌물 수수, 비자금 횡령, 국정원 특활비 등 돈에 얽힌 수 많은 비리들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당장 그가 받고 있는 혐의는 약 20가지나 된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유죄는 그 누구의 미래보다도 또렷한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엔 (아직?) 용산, 밀양, 쌍용차, 강정 마을이 없다. 이 이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대통령' 이명박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표적인,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들. 여전히 나에게 이명박이란 이름 세 자는 저 사건들과 오버랩 되고있는데, 이 이름들을 거론하지 않고, 그 책임을 묻지 않고서 이명박을 청산한다는 것이 대체 가능한가? 나에게 그런 "청산"이란 지난 5년의 책임에 대한 청산으로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하는, '발라버림'식의 복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의 구속 만으로 기뻐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르다. 


만약 이 구속을 그 자체로 변화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결코 바뀌지 않을 세상의 안전장치로서 미약한 변화에 불과하리라. 이 주장이 너무 나간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우리 주변에는 이 구속을 전적으로 자신들의 공이라 자랑스레 떠들며 만족스러워하는 이들이 넘쳐나지 않던가. 변화를 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균열을 내지 못할 수준에서만 허락되고 있고,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바꿀 만큼 전복적이었던 위세는 어느 새 '여기서 뭘 더 바라냐'고 대답하는, 지극히 반동적인 위세로 바뀌었다. 지난 10년 간의 운동들이 복수의 일차적 완수 앞에서 간단히 지워질 때, 실은 세상은 변할 리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 그 누구도 이름 지워진 사건들에 대해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대체 우리는 무얼 위해 싸웠던 것일까. 나는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대체 책임자는 어디있나? 책임을 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 누구도 책임에 관련하지 않게 되었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 새 그가 탄 차가 동부구치소 내부로 사라졌다. 그래도 기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몸 속 깊이 응어리진 분이 나를 괴롭혔다. 

2017년을 마치며: 공중의 편지

대충사는 이야기 2018. 1. 1. 11:02

올 한해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써봅니다. 왠 뚱딴지같은 편지냐며 갸우뚱할 당신의 얼굴이 벌써 선합니다만, 이건 저의 오랜 버릇 중 하나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재미없는 걸 못 버티는 버릇 말입니다. 똑같은 형식의 결산을 매년 고지식하게 되풀이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재미없는 짓이지요. (물론 쓰는 사람은 편하고 보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더 쉬울테지만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굳이 이 편지를 써 당신께 부치기로 한 게죠. 물론 그 사이에 이 결정을 가능케 한 사고의 과정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이전의 결산과는 다른 방식의 결산에 무엇이 있나 하며 고민하던 와중, 제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던 토픽 중 하나인 편지를 떠올렸지요. 편지의 특이성을 직접 체험하자, 편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예 편지를 써보자!라는 결심이 이 결정과 결과물이 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제가 올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의 리스트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지난 한 해동안 천착했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한다는 의미에서도 결산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를 사로잡은 세 가지 토픽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지-서간체요, 둘은 (지금 여기서의!) 페미니즘 운동이요, 셋은 트렌드로서의 회귀였지요. 이 중 세번째에 대한 생각은 이미 당신께서도 읽으셨을 졸문 '리부트라는 징조 혹은 현상'을 통해 맛보기로 논한 바 있으니, 여기서 굳이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몇 마디만 덧붙이자면, 저는 이 현상이 역사적 망각과 '신화'의 재생산의 상호보완적인 체계 속에서 '추억'이랄 것의 흔적이 거의 지워진 시대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과 공명하는 징후는 아마도 물성에 대한 고집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습니다. 역시 결국엔 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돌아온 거죠. 이에 대해선 언젠가 아주 길게 논할 자리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편지였는가? 라는 걸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사실 편지란 참 이상하지요. 이 때 편지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표현 양식으로서의 편지를 이르는 것입니다만, 이 편지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수신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그저 '이건 편지다'라고 생각하며 수신자라는 텅 빈 항을 의식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편지가 편지''으로 쓰여버린다는 게, 그렇게 성립되어버린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당장 이 편지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당신, 즉 수신자란 나의 애인일 수도 있고, 나의 오랜 친구일 수도 있으며, 내가 얼마 전 연을 끊은 누군가일 수도 있지요. 혹은 내가 모르는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답신이 오지 않을 수 있고 아무에게도 답신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편지가 편지로서 성립되는 데에 그 어떤 지장도 되지 못하지요. 여기서 두 명의 자크가 (서로 '따로 또 같이') 배달 불가능성이라 지적했던, 편지라는 표현 양식에 내재된(혹은 내재될 수 있는) 탈구축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편지란 말하자면 '열려있는' 에크리튀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열려있음이란 수 많은 '' 사이의 수 많은 간극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고 진동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 간극들 중 하나인 시간성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편지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시차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들로 인하여 그 존재가 정당화됩니다. 하나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시차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 시간과 이야기 시간의 시차이지요. 이를 (타자에의?) 간섭 불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얼핏 유사해보이는 표현 양식인 1인칭 소설이나 강연문과는 다른, 편지-서간체만의 위상을 만든다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발신자의) 과거가 (여러 측면에서) 비가시적인 (수신자의) 미래에 대해 현재진행형으로 말을 거는가하면, (서술 시간의) 과거가 (이야기 시간의) 대과거를 소환해 개인적인 경험을 새로이 풀이하며 미래를 향한 공통의 ()체험으로 변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편지란 이러한 간섭 불가능성의 시차가 공통의 평면 위에서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혼합하며 공존하는 '가능성의 상태'에 다름 아닌 겁니다. 가장 단순해보이는 이 표현 양식이, 실은 구조적으로 고도로 착종된 형태인 것이지요. 아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군요. 그 착종으로 인해 풍요로운 단순함을 얻었다, 라 말하는 게 적합해 보입니다.

 

모두들 작금엔 편지 따윈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작금"이 이메일이나 PC통신, SNS의 시대를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찍이 60년대에 아도르노는 서간체란 낡았다고 한 바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편지 문화가 암묵적으로 승리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 봅니다. 애초에 중세 이전에는 편지란 소식을 전하는 배달부, 즉 간극을 연결하는 선()으로서의 인간매체를 지시하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더 나아가 플루서는 아예 마리아의 잉태를 전하러 온 가브리엘의 복음적 성격을 들어 그를 편지로 인식하기도 했구요. 매체사 관점에서 볼 때 편지는 종이 필기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문체론적 기능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지금 디지털 문화 안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을 띄는 게지요다만 이젠 장문의 편지 양식이 아닌 엽서 양식이그것도 편지의 존재를 가능케하던 시차가 거의 지워진 -이 편지만 해도제가 '발행'을 누르는 동시에 당신께 (물리적으로도착할 수 있지요것이 새로운 편지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카라타니 코진이 나쓰메 소세키를 논하면서 "소세키의 18세기적인 부분이 21세기에 있어서 더욱 더 새로운 의미로 살아날 것"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편지의 '단순한' 가능성이란 아직도 미래를 향해 열려있습니다.

 

이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올해만큼 대외적으로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강력하게 부상해 사회적 노이즈를 일으킨 해도 없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이것도 제가 앞서 비판한 역사적 망각의 한 예에 불과한 걸까요? 하지만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이후의 할리우드를 떠올리면, 혹은 유아인의 '애호박 게이트' 이후의 판국을 떠올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전에 이런 일들이 폭력으로서 이 정도로 공론화되어 문제시된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담론의 지형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게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여기서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며 논하고 싶은 건, 이러한 양상을 그저 '시대가 바뀌었고 씹치들은 도태된다(혹은 그럴 것이다)'는, 거의 무지성적으로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는 관점들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바로 전형적인 '사이다' 전략이지요. 정치와 윤리(적 '캠페인')를 헷갈린 채,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막연히 중얼거릴 뿐인. 그러나 들뢰즈가 말했다시피 "두려워하거나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필요만 있을 뿐"이지요


2015년부터 거의 폭풍같은 속도로 가시화되어 지금은 한국 사회의 주요문제적 담론, 아니 전선 중 하나로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이 왜 하필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체계를 파악하지 않고선 다음 단계의 투쟁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섣불리 상처에 대한 동감을 논하거나 (이 방향은 고통 자랑과 복지론으로 추락할 위험이 상당하지요) 혐오와 유교간의 커넥션 운운하며 미개론을 펼치거나 (이 논리로 국제적인 동시성을 지닌 흐름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혐오를 그저 일관된 형태로 보는 것 (가부장제의 권위의 점진적 붕괴 '이후'의 양상 -예컨대 성재기!- 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었지요) 은 질 나쁜 농담에 불과하지요. 아니면 '진보 계몽 운동'의 축소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으려는 착실한(!) 시도이거나. '우리는 옳다'는 '캠패인적' 사고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경제, 계급, 세대 중 한 축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인 혐오'논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리 활성화될 수 있게 된 정황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투쟁의 구체적인 방식을 재고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급하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젠더 퀴어 담론이 최근 트위터 내에서 활성화된 것, 그리고 그럼으로서 ('상호교차성'이라 불리는) 소수자 담론의 내포와 외연이 어느 정도 확장된 건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만, 혹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신지 궁금해지는군요. 물론 당연하지만, 저도 이 지점에서 정말이지 열심히 해야합니다. 저 역시 여기저기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실 이 두 문단은 저 자신에 대한 꾸짖음에 가깝습니다.


다소 개인적인 얘기로 이번 편지를 끝맺을 준비를 해볼까요. 올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해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얘기이기도 하고, 저 자신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건들에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넘쳐난 해였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허한' 이미지였습니다. 어느 늦은 밤 퇴근길에 인적 없는 골목길을 가로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건물에 불이 꺼져있고 적갈색의 벽돌엔 낙서가 빼곡하여 참으로 을씨년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거기엔 그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왠지 모를 익숙함과 위화감이 있어 저를 서서히 휘감았습니다. 한참을 걷고 돌아보고 난 뒤에야 저는 그곳이 폐쇄된 재개발촌이며, 제가 아직 운동권이었을 적 어떤 재개발 반대 집회에서 연대 발언을 한 적이 있는 곳임을 깨달았습니다. 곳곳에 붙어있거나 땅에 힘없이 널부러져있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강력하게 지시했지요. 그 이미지는 참으로 공허한 곳에서 참으로 공허한 기억과 결부되어, 그 공허함을 통하여 저의 닫힌 과거를 끌어올렸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비로소 스스로의 시간이 운동의 계절을 지났음을 실감했습니다. 앞서 "닫힌 과거"라 말한 이유는, 근 1년간 제가 오랜 기간 몸 담았던 모든 운동 단체들과의 연을 끊고 소액 후원자 및 지지자 정도로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거리로 나가 '동지'들과 함께 차벽과 방패들에 몸을 던지거나 밤새 농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 1년간 그럴만한 사태가 (거의) 벌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저는 이젠 운동권이라 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어있었지요. 이는 지난 2016년의 결산에서도 밝혔듯 운동권 내부에 대한 분노와 회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지난 촛불 정국이라는 '사건' 때문이라 해야하지요. 벌써 심적으로 지나치게 까마득하군요. 박근혜의 탄핵 선고로부터 이제 9개월이 채 안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혁명적인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이진 않았고, 본질적으로 반동적/식민적이었다 해야지요- 정국 속에서 태어난 이 반동적인 '새 시대'가, 저에게는 차라리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공포? 예, 그렇습니다. 내가 거리에서조차 언제든지 얼마든지 부정되고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말입니다(당연하지만 이것은 '보편윤리' 운운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런 감상은 '새 시대'가 저에게 억지로 안겨준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흐름을 앞에 둔 저에게는 더 이상, 혹은 최소한 지금은 거리로 나갈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가득 찬 거리가 무섭다기보다는, 그 속에서 더 이상 '소란스러운' 소속감-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게죠. 그래서 저는 이제 오롯이 홀로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바람에 실어날린 고엽처럼.이게 정말 괜찮은 삶인지, 타인에게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올바른 처사인지 하는 생각이 종종 피어오르긴 합니다만...


이만 이 어지러운 첫번째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당신에게 답신이 올 일은 전혀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편지를 계속 쓰긴 쓸 생각입니다. 다음 편지들과 한참을 미루고 미룬 글들을, 가능한 빨리 완성해 부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생각대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요! 다음에 또 소식 전하지요. 



12월 31일



 

p.s.


올해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존 버거, 지그문트 바우만, 제리 루이스, 제임스 로젠퀴스트, 타니구치 지로, 프로디지, 그웬 아이필, 척 베리, 조너선 드미, 츠베탕 토도로프, 존 애쉬베리, 홀거 추카이, 예브게니 옙투셴코, 박상륭, 류사오보, 케이트 밀레트, 박종필, 플로 스타인버그, 스즈키 세이준, 조동진, 린다 노클린, 토브 후퍼, 마츠모토 토시오, 미카 바이니오, 다커스 하우, 조지 A. 로메로, 팻츠 도미노, 밀드레드 드레셀하우스, 해리 딘 스탠턴, 다니엘 다리유, 그리고 이스탄불, 라스베가스, 모가디슈의 익명들. '지랄같았던' 작년 이상으로 망연한 해였다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더 많은 죽음 뿐이지요

직관과 경험에 대하여

대충사는 이야기 2015. 3. 22. 21:00


 직관은 감성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 국한돼 있는 한에서의 직관은 감성적이지만, 선험적인 직관은 능동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달의 한쪽 면만을 볼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달의 반대쪽 면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직관의 능동성의 간단한 예다. 또 이것은 동시에 선험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달의 반대쪽 면을 경험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직관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추리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달의 모습, 즉 형태, 색상 등등 여러 감각적 성질들은 그것에 신경쓰인 인간에게만 존재하지만 달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지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입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에 관여하는 부분은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순전히 존재의 형식일 따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달을 지각했을시의 형상과 지각하지 않았을 때의 달의 형상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두 점 사이에서의 직선은 가장 짦은 선이다'의 명제는 경험 판단입니다. 기하학에서의 모든 대상들은 우리에게만 존재하며, 우리는 실제로 직선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선을 그려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감각에 의해 직선과 근접해 있는 선을 직선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와 즉 공간과 다른 어떤 곳의 공간에서는 이 명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든 선험적 인식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직관과 사고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올바른' 감각적 인상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표상 자체가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만약에 시간과 공간의 표상이 우리에게 부재한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일해 질 것이다. 그러나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경험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이 불가능해 질 것이다. 순수한 선험적 인식은 존재하지 않다.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경험적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선험을 지칭한다.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진상이 오직 경험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경험하지 않고도 무엇을 직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으니. 우리에게 순수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우리의 능력에 자연의 법칙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간다는 사실에 있다. 경험적 직관은 단적으로 하나의 상이다. 그리고 경험적 직관은, 칸트가 말했듯 항상 수용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어떤 하나의 상을 산출해내는 능력이 존재한다. 스스로 전체인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학문의 진보는 단적으로 이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개념적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순해질 것이며, 또 학문이나 역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적 인지능력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기억과 직관의 인과성에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개념 능력이 거의 없는 동물들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이다. 동물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적 인지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추상적 인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동물은 직관에 의한 인과성에 대한 포착과 희미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명 동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표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물은 충분히 현실적으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경험의 전후에 대한 시간적 관계를 단수나마라도 포착할 수 있다. 시간 표상이 없더라도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 지각은 광상곡이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라도 경험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