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취당한 말들: 4/16

대충사는 이야기 2018. 4. 21. 01:30


그러니까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이미 세상에 있던 것을 어떤 상황에 맞추어 재조직할 때, 그 말은 설명되지 않던 실재를 설명할 수 있게 하면서 기존에 우리를 가두던 우리를 자각하고 그 바깥의 영토를 겨우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말의 체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말을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부정적인 말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든 이는 동일하다 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더 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다. 예컨대 '아재'라는 말이 사용되는 양상을 들여다보자. 본래 '아재'란 중장년 남성을 칭하는 말인 '아저씨'의 낮춤말로서 이들의 우스꽝스런 추태를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한 지칭대명사로 인터넷상에서 사용되었으나 어느 새 '아저씨'들이 스스로를 여전히 재치있고 흥미롭고 '젊은' 층으로 꾸미기 위해 쓰는 지칭대명사가 되어버렸고, 아재 온라인, 롯데리아의 아재버거, 김수박의 <아재라서> 같은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본래 '아재'를 풍자의 목적으로 사용하던 이들은 이전에 '아재'라 부르던 층을 지칭하기 위해 '개저씨'라는, 좀 더 직접적인 욕설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보다도 어처구니없는 말이 한 둘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 및 지향성을 타인에게 밝히는 것을 이르는 말인 '커밍아웃'은, 예컨대 '덕밍아웃'같은 파생어들에 의해 본래의 이데올로기를 희석당한 채 기껏해야 '숨기던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곤 하며, 강간 문화의 폐혜를 비판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는 운동을 지칭하는 말인 '미투'는 '미투 가해자(혹은 피해자)' 따위의 기사 제목이나 대화, 혹은 '미투'를 이용한 캐치프레이즈의 범람 속에서 오히려 운동의 쟁점인 성폭력과 성폭력을 가능케 한 강간 문화의 힘을 담론장에서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로 쓰이고 있다. 오늘날 말들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전혀 반대의 의미로 (오)작동되고 있는 현상은 이전에 말이 지배세력에 의해 (오)작동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이래로 '노동자' 대신 '근로자'가 표준어로 지정되어 주로 쓰인 것은 자본이 말의 이데올로기-논리를 은폐하고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이데올로기-논리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즉 논리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싸움. 


그러나 현재에 이는 말의 홍수 속에서 말의 실재감과 실재의 폭력을 표백하고 일말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회가 나름 용인할 수 있는 '안전한' 수준으로 말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적극적으로 재전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 때 소수자들이 (폭력을 무화하기 위해) 취했던 말의 재전유 전략이 역으로 지배세력에 의해 (논리를 무화하도록) 쓰이는 것. 즉 논리 자체를 극단적으로 범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오늘날 말이 비정치적으로 정치화되는 방식이다. 이제 지배세력에겐 말을 은폐할 필요조차 사라진 게다. 앞서 말했듯 말은 일종의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어떻게든 탈취되어 무기로서의 능력을 상실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무기가 더 남아있을 수 있나


눈에 걸핏하면 치이던 '헬조선', '세월호 이후' 등의 말들을 언제부터인가(라곤 하나 실은 정권 교체 이후부터) 신문 기사나 문학 잡지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어쩌면 이 방식의 한 결과가 아닐까? 정권 교체를 제외하고는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이루는 대부분의 주요 사안들 제대로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은밀하게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 정권 교체 직후 이 말이 갑작스레 시야에서 지워진 것을 보며 나는 그렇게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헬조선'과 '세월호 이후'를 따지는 게 벌써 낡아버렸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유한국당? 조선일보? 허나 삶의 도처에 있는 폭력을 지시하기 위해 창출된 말이 언론과 지식인들이 내걸던 어떤 정의에 의해 외려 남용되고 그 정의의 적당한 유효기한이 끝나자마자 버려질 때, 그래서 말의 실재감이 기껏해야 거품 낀 유행어의 그것 수준으로 추락한 듯 보일 때,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을 막고 말의 자리를 따져야 할 이들이 역으로 말이 허투로 쓰이는 것에 일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한다. 말을 탈취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지배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의에 도취된 '선인'들이기도 한 것이다.